|
함께 먹음은 일체감을 끌어내는 주춧돌이고, 서로 마음을 여는 강력한 수단이다. 오늘도 재잘대며 즐겁게 점심시간을 보내는 학생들은 어떤 먹음을 경험하고 있을까. 한겨레 자료사진
|
삶, 사유, 논술 /
4교시가 끝나간다. 이 수업을 늦게 마치면 센스없 는 교사로 찍힐 수 있다. 1분이라도 남겨주면 학생들은 슬슬 교실 출입문에 모여든다. 점심 배식차 앞에 1초라도 먼저 줄을 서기 위한 예비 작업이다. 학생들은 이미 한 달간의 식단표를 별표, 꽃표, 형광펜으로 체크하고 달달 외웠다. 가장 기다리고 기대하는 시간. 바로 점심시간이다.
매일 하면서도 전혀 질리지 않고 즐기기로는 단연 먹는 일이 으뜸이다. 인간은 늘 먹는다. 배고파서 먹고 심심해서 먹고 건강을 위해 먹는다. 그러나 ‘먹음’은 단순히 영양 섭취에서 그치지 않는다. 생각하는 인간답게 인간의 먹음은 다양한 차원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우선 ‘먹음’ 속에는 먹히는 대상과 먹는 존재의 일치가 숨어 있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불멸하는 음식인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를 먹는다. 반면 인간은 콩, 꽁치, 소처럼 태어나 죽어야 할 것을 먹는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의미하는 빵(몸)과 포도주(피)를 마시며 성찬식을 한다. 성체(聖體)를 씹고 마시면서 신자들은 예수와 하나가 된다. 동물을 숭배하는 토테미즘도 옛 부족들이 사냥할 때 주로 잡아먹었던 동물을 신격화한 것이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은 곧 우주를 먹음이요, 내 몸에 우주를 담는 행위다.” ‘디지로그’에서 이어령 교수가 한 말이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먹음은 곧 문명의 의미를 담는다. 우리 민족은 곰이 쑥과 마늘을 먹은 데서 출발했다. 아담과 이브가 이성을 얻게 된 이유도 선악과를 먹은 데서 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고 그 음식을 먹고 마실 때, 그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나의 근원인 조상과 대화하고 느끼는 행위이다. 드라마 <대장금>이 해외에서 선풍적 인기를 누린 원인도 음식에 관한 문화적 공감을 이끌어 냈다는 점에 있다.
음식의 조리 과정을 분석하면서 인간 문화의 구조를 파악해낸 철학자도 있다. 프랑스의 구조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다. 그는 구운 것과 끓인 것을 구분하면서, 구운 것은 자연적이고 끓인 것은 문화적이라고 해석한다. 끓이기 위해서는 음식의 원재료와 불 사이에 냄비 같은 문화적 매개가 필요하다. 용기 ‘안에’ 담고 조리하기 때문에 친밀한 음식이 된다. 반면 굽기 위해서는 음식의 원재료와 불을 문화적 매개 없이 직접 접촉시켜야 한다. 용기 ‘밖에서’ 조리하기 때문에 낯선 음식으로 풀이된다. 다소 엉뚱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원시 부족들이 손님에게는 구운 음식을, 가족에게는 끓인 음식을 내었던 모습에서도 문화와 자연에 관한 생각의 틀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먹음으로 현대사회를 가늠하다 보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겹쳐짐을 피할 수 없다. 영화 <괴물>을 보면, 한강에 사는 평범한 물고기가 사나운 괴물로 바뀐 이유는 포름알데히드를 ‘먹은’ 탓이다. 이제는 오염된 것을 먹으면 존재가 뒤틀릴 수 있다는 경고를 아무도 논리적 비약으로 읽지 않는다. 웰빙 열풍의 주범도 안전하지 않은 먹거리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다. 아토피 아이들의 고통과 불임 부부의 증가가 환경호르몬(내분비교란물질) 탓이라는 지적은 일부 과학계에서 의심없이 굳어지는 이론이다. 컵라면, 공기, 물속의 화학물질들이 현대인의 먹음 속에서 미래인들의 몸을 결정하는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환경호르몬이 축적되고 인체에서 병을 일으키는 과정을 생생하게 추적했던 테오 콜본도 <도둑맞은 미래>에서 눈을 감고 달려가는 현대 과학문명을 질타하였다. DDT(살충제)를 개발하여 노벨상까지 받았던 화학자 파울 밀러는 곤충과 말라리아 전염 모기를 줄였을지는 몰라도, 끈질기게 인체에 남게되는 DDT의 위험성을 알지 못했다. “해충을 잡기 위한 DDT가 화장분처럼 지구 표면에 마음대로 뿌려진 후에야 우리는 DDT도 인간의 죽음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편에서는 자연 환경과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지만 환경호르몬도 여전히 늘어만 간다. 표백제를 섞은 밀가루에 유기농 채소를 첨가한들 안전한 빵이 될 수는 없다. 햄버거 속의 돼지고기가 화학 영양제를 듬뿍 첨가한 인공사료로 키운 돼지고기인 한에는 웰빙 햄버거도 요원하다. 가축을 기를 공간을 얻기 위해 나무를 계속해서 마구 베어내어, 우리가 햄버거 하나를 먹을 때마다 열대 우림 2평이 파괴된다고 한다. 엄청난 양의 가축 분뇨 때문에 정화시설이 부족해서 2차 감염이 확산된다. 농작물에 뿌리는 과다한 농약은 소비자만 위협하지 않는다. 그보다 앞서 생산지 농부들의 육체부터 잡아먹는다. 그런 점에서 ‘공정 무역(Fair Trade)’, 즉 선진국의 소비자가 저개발 국가의 생산자와 국경을 넘어 무공해 재배를 직접 계약하는 거래는 너무나도 반가운 소식이다.
|
권희정/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
|
음식 속에는 문화와 시대의 거의 모든 관계가 담겨 있다. 미국문화의 세계화에 코카콜라와 맥도날드가 기여한 업적도 그렇고, 때만 되면 우리들을 긴장시키는 개고기 논쟁도 그렇다. 모두 ‘먹음’을 둘러싼 모습들이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음식은 무엇보다 ‘나눔’과 ‘사귐’을 이어주곤 한다. 다른 사람을 사귈 때 “차나 한 잔.”, “언제 함께 식사라도.”는 세계적으로 통하는 인사말이다. 함께 먹음은 일체감을 끌어내는 주춧돌이고, 서로 마음을 여는 강력한 수단이다. 오늘도 재잘대며 즐겁게 점심시간을 보내는 학생들은 어떤 먹음을 경험하고 있을까. 내 입으로 들어오는 밥과 반찬에서 자연과 문화의 두터운 흔적들을 읽어내면 그 맛도 색다를 것이다.
<하루 하나씩 친구와 나누는 20분간의 대화>
1. 나에게 ‘고향의 맛’은 무엇일까? 자유롭게 떠오르는 생각과 이유를 이야기해 보자.
2. 한 집단의 음식을 조롱하는 것은 당사자에겐 큰 상처가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지 이야기해 보자.
3. 음식을 함께 먹으면 더 친해지는 느낌이 든다. 먹는 행위가 사귀는 수단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각자의 기억을 더듬으며 자유롭게 이야기해보자.
4. 즐겨먹는 라면을 하나 골라 성분을 확인해 보자. 재료들의 가공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것을 생산한 사람의 작업 환경을 상상해 보자.
5. <육식의 종말>에서 제레미 리프킨은, 소가 지구 전체 토지의 24%를 차지하고 생산되는 곡물의 1/3을 먹어치운다고 한다. 이런 현상의 원인을 생각해 보고, 기아국과의 관계를 검토해 보자.
6.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사는 <오래된 미래>에서, 친환경적 개발의 이상을 전통적인 삶의 지혜에서 찾았다. 기업의 경영활동과 소비자의 행위에서 반환경적인 모습을 찾아보고, 이것을 줄일 수 있는 방법과 대안을 생각해 보자.
권희정/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
|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사용해 보세요. 전자는 현실의 한계를, 후자는 가장 소중한 핵심 가치를 찾아 줍니다.
|
|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