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0.15 19:23
수정 : 2006.10.15 23:43
영어공용화 가상뉴스라지만 요즘 영어광풍 보면 섬뜩
우리 말·글의 미래는 어떨까
1318책세상
“취학 전 아동을 둔 학부모들은 벌써부터 영어 학교와 한국어 학교를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섰다고 합니다. 정부는 홍콩에서처럼 영어 학교와 한국어 학교를 학부모와 학생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한다고 합니다.”(투데이 뉴스 스페셜)
‘2023년, 영어 식민지 대한민국을 가다’라는 부제가 붙은 <한국어가 사라진다면>(한겨레신문사 펴냄)은 영어공용화 원년을 맞이한 2023년의 뉴스를 이렇게 전한다. 학부모들의 선택은 말할 것 없이 영어 학교다. 한국어 학교에는 가난하고 행동이 굼뜬 부모의 자녀들뿐이다. 그나마 2053년에는 한국어 학교가 아예 존재를 감추게 되고, 학교마다 미국인 영어 교사가 교직원의 45%를 넘는다. 이젠 누구에게나 영어 이름 등록이 허용되고, 결혼 상대자 선호도도 미국인이 1위다. 그리고 100년 뒤 한국어는 말끔히 사라진다.
물론 이것은 실제가 아니다. ‘만일 영어공용화가 실시된다면’이란 가정 아래, 우리말을 사랑하는 다섯 명의 소장학자가 모여, 가상 시나리오를 작성해 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에서 광적으로 일고 있는 영어교육 붐 현상과 안하무인격으로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미국, 그리고 그에게 빌붙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선택할 유일한 생존의 길임을 역설하는 자들이 범람하는 실정이고 보면, 단순한 기우, 혹은 한때의 파란이겠지, 하며 무심히 넘길 일은 아니다. 실제로 2001년 정부는 제주도를 국제자유도시로 육성하겠다며 제주 영어공용화 추진 의지를 밝혔고, 경기도와 곳곳의 광역시에서 ‘영어타운 조성’ 붐이 일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FTA협정으로 뻥 뚫린 길을 물밀 듯 밀고 들어올 외국 교육기관들과 ‘효율성’과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쌍손 들어 그들을 환영할 사람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 그들의 시나리오가 단순한 ‘가상’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섬뜩한 생각이 든다.
말과 글은 나와 너를 이어주는 의사 소통의 도구일 뿐 아니라, 내가 살아온 시간과 환경, 나의 인격과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내 존재의 거울이다. 그렇기에 말을 잃은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할 수밖에 없고, 이곳에도 저곳에도 온전히 뿌리내리기 힘들다. 개인 이 이러할진대 한 나라, 한 민족에 있어서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 속에는 수천 년 동안 그들이 함께 살아오며 함께 만들어온 그들만의 문화가 있다. 이것은 그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고 허물 수 없는, 그들 고유의 아름다운 얼굴이다.
한글은 세계의 언어학자들까지 찬탄해 마지않는 우리의 자부심, 우리 고유의 찬란한 얼굴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런 우리의 언어가 ‘효율성’과 ‘세계화’를 앞세우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밀려 ‘영어’의 시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 그리고 100년 뒤, 이 책의 저자들이 예견한 대로, 어쩌면 우리의 말과 글은 아예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3년 전, 이 책을 발견하던 때부터 해마다 10월이 되면 아이들과 함께 이 책을 읽으며 ‘우리 말과 글’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또한 ‘영어공용화 찬반’ 토론도 학급별로 진행해 보고, 더 토론을 원하는 아이들이 있을 때는 방과 후 따로 남아 한쪽이 지쳐 떨어져 나갈 때까지 끝장 토론도 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정체성이란 것 역시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간순간 만들어지는 하나의 매듭에 불과한 것뿐이라면 크게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우리는 ‘방향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방향은, 획일이 아닌 다양성, 효율이 아닌 진실성을 지향해야 하리라.
백화현/전국학교담당교사모임 회원, 관악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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