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 학원과 다른 것이 뭐가 있나
세상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사람들의 생각도 바뀐다. 당연히 교육의 대상과 목표도 바뀐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학은 별로 안 바뀌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변화를 맹신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변화되지 않는 인간의 인문적 가치를 더욱 중시여기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저 추운 곳에서 외투를 입고 더운 곳에서는 외투를 벗는 것과 같은 변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정도다. 그리고 이러한 당위적인 최소한의 변화에 대하여 안일한 혹은 이기적인 저항을 하는 우리의 대학사회를 말하려고 한다.
누가 어디서 먼저 시작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업과 국가와 대학이 가진 보수성의 정도에 대하여 말을 할 때, 기업이 바뀌고 공무원이 바뀌고 그 다음에 가장 변화에 늦은 곳이 대학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본인이 대학사회 속에 직접 있다보니 정말이지 그 말이 참 맞는 말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환경의 변화에 따른 교육의 변화가 없거나 아주 적은, 그러니까 아무리 더워도 외투를 벗을 줄 모르는 대학의 현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엄청난 변화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대학교의 어문계열은 (논의를 어문계열로 한정 짓겠다. 그렇지만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문제가 어문계열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거의 변화하지 않았거나 변화를 하였다 해도 포장지만 조금 바꾼, 눈 가리고 아옹식의 피상적인 변화만을 하였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대중적인 차원에서 한국사람들에게 ‘외국’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는 중요한 상징적인 원년으로 나는 그 유명한 올림픽의 해인 1988년을 삼고 싶다. 그 때 처음으로 관광목적의 해외여행이란 것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국가적인 특별하고 중요한 용무가 아니면 외국이라는 곳을 나갈 수 없었는데 1988년을 기점으로 보통의 사람들도 관광을 하기 위해 외국을 나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좌우간 이때를 기점으로 외국에 대한 정보의 양과 질이 변화되었고 이에 따라 외국어와 외국문화 이해의 또 다른 차원의 필요와 변화가 동시에 일어났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 대학교 어문계열의 교육현실은 88년 이전과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88년 이전의 교육과 달라진 것이 없다
가장 중요한 교과과정, 교수자의 구성이나 교육목표 그리고 학생과 사회의 의식 등의 큰 부분에서 변화된 것이 별로 없다. 물론 멀티미디어의 발달로 교재나 학습방법 등의 변화는 눈부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디 외국어라는 것이 종이사전에서 전자사전으로 바뀐다고 하여 단어가 그렇게 쉽게 외워지는 문제가 아니고 보면 그런 것은 극히 지엽적인 문제이다. 그런데도 학생들 어학능력의 변화는 괄목할 만하다. 사실 이점은 신기한 면이 없지 않다. 대학은 별로 변화 된 것이 없는데 학생들의 외국어 실력은 월등히 향상되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가만히 볼라치면 그게 다 해외여행, 어학연수 등 대학 자체의 변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그러니까 학생 스스로의 공로이거나 돈의 위력이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정확할 것 같다. 교환학생과 같은 프로그램이 학교교육과정의 한부분이기는 하지만 어찌되었거나 학생들의 어학능력을 우리나라 대학교의 정규프로그램에서 배양시킨 것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많다. 교과과정 뭐 바뀐 것이 있나 교육과정면에서 보면 문법, 회화, 강독, 작문 등의 언어능력배양과목이 주를 이루고 여기에 문학, 어학 과목들이 추가된 전통을 고수한다. 최근 들어 성장하고 있는 지역학적인 과목들을 살짝 끼어 넣은 것이 조금 바뀐 정도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필자가 어문계열을 다니던 1980년대와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 심지어는 교재까지도 같다. 다르다고 말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내용을 볼라치면 다 거기서 거기다. 50보와 100보의 차이가 차이라면 차이지만 외부적인 변화와 비교해보면 그걸 변화라고 하기에는 절대적인 함량미달이다. 각 담당교수마다 자신의 교재는 이러 이러한 면에서 차별화되었다고 말하고 실재로 그렇기는 하지만 교육의 내용이나 방식이라는 커다란 틀에서는 그러한 차별화가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기 힘들다. 하여간 지역학 혹은 문화라고 불리는 과목이 조금 추가되고 멀티미디어의 발달과 유행에 따라 교과목의 이름이 조금 색다르게 느껴지도록 바뀌기는 하였지만 기본적인 맥락은 과거와 유사하다. 2000년 이후 학부제라는 것이 가속화됨에 따라 절대적인 개설 강좌의 수가 줄어들면서 오히려 내용적인 면에서 보면 88년 이전보다 더 부실해졌다는 평가까지 가능하다. 앵무새 철밥통 교수가 여전히 그대로다 교수진의 경우 80년대와 비교하여 교수대 학생비율이 획기적으로 나아지지 않은 지금의 상태에서 80년대의 교수진들이 아직도 교원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랜 경험과 연륜 그리고 학문적인 완숙을 가진 교수님들이 대학에 있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런데 경험이 단순한 반복이라면 어찌되는가? 교수들의 자기 발전에 대한 통렬한 노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연륜은 고집이 되고 학문적인 완숙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전통이 오히려 철밥통에 대한 집착으로 변질되어 가장 싱싱해야 하는 교육현장을 매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걱정을 나만하는가? 일단 수적으로 교수일인당 학생수 등의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볼 수 있는 교수진의 변화가 오늘날의 현실적 필요와는 차이가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학교의 외국어회화수업의 수강인원이 사설학원의 몇 배가 넘는 경우마저 허다하다. 질적인 면에서는 앞에서 말한 고집, 반복, 철밥통의 문제로 인하여 수적인 면보다도 현실이 더욱 참담하다. 교육목표는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옹 교육목표는 국제전문가 양성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붙는다. 그런데 원래 교훈이니 사훈이니 하는 것들이 그렇듯이, 되기가 힘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자’는 식의 말이 대문에 걸리는 법이다. 즉 말만 좋아서 국제전문가요 세계적인 교양인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교과과정, 교수진 등을 통해서 보여주는 교육역량과 환경 등을 고려해 볼 때 그런 목표는 그야말로 “좋은 말”정도로 생각되어진다. 그러니 솔직히 말해 ‘해당외국어 잘하는 사람’ 정도가 가장 근접한 현실적인 교육목표이다. 너무 비참한 말이라 참 하기 싫지만 현실적으로 한국의 대학교 어문계열은 “외국어 가르치는 곳”이다. 교육목표를 말할 때 그 현실적인 목표를 대놓고 이야기하기에는 좀 무안해서 적당히 그럴듯한 미사어구들로 포장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80년대와 그 이전의 어문계열 교육시스템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는 지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을 하는 목표가 외국어를 할 줄 아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던 시대의 것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사회적인 인식도 대학의 어문계열은 ‘외국어 가르치는 학원’ 사회적인 인식도 이에 보조를 맞춘다. 나는 학생들의 의식을 통해서 대학교 어문계열에 거는 사회적 기대 혹은 평가를 느끼곤 한다. 그들 역시 대학교 어문계열을 외국어 배우는 곳 정도로 생각하고 그렇게 기대하면서 입학하는 경우가 많다. 해당 외국어로 된 문학이 좋아서 그것을 배우고 느끼는 것을 주 목적으로 어문계열에 들어오는 경우는 상당히 적다. 그곳의 어학을 -어학은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학문으로서의 어학을 말하는 것이다- 학문적으로 접해보겠다는 생각도 거의 없다. 고등학교의 입시지도 선생님들 역시 거의 대부분 어문계열은 말 배우러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적인 공감대를 통해서 본 대학교 어문계열은 그야말로 “말 배우는 곳”이다. 스페인어과는 스페인어배우는 곳, 중국어과는 중국어 배우는 곳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다. 들어오는 학생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며 교수들도 많은 복잡한 요구에 대응하기 보다는 그냥 그렇게 뭉개면서 20년 전의 교재를 매년 반복하는 것이 편안한 일이다. 사회가 강하게 요구를 하지 않고 -해봐야 소용이 없을 테니 그런 것도 있지만- 학생들이 구체적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거나 겨우 느끼는 정도인데다가 교수들마저 마냥 편안한 것에 익숙해져 매너리즘에 빠져있다면 인문학적인 화두는 제쳐두고라도 국제적, 시대적인 변화에 따른 대학의 당위적인 변화는 물 건너 간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나마도 엉터리 졸업장 난발 이러한 이유로 20년 전에 비해 국제, 국내적인 환경과 필요가 엄청나게 변화되었건만 대학교 어문계열은 비슷한 사람들이 비슷한 목표, 즉 외국어 할 줄 아는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서 적당히 가고 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힐 일이 있다. 그나마 그런 구시대의 변화되지 못한 목표마저도 철저히 지켜지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외국어문계열의 대학전공을 졸업한다고 해당 외국어를 잘 하냐하면 그게 그런 게 아니다. 딱히 내 주장에 맞는 통계 수치가 있을 리 없겠지만 대학에서 외국어문을 전공하고서도 외국인과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반이 안 될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면 내가 너무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엄청난 폭로를 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생각할 때 현실은 이보다 더 참담하면 했지 더 긍정적이지는 않다. 즉 학문과 사회가 시대적으로 요구하는 대학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인 인재양성은 고사하고 외국어 구사능력조차 없는 학생들에게 무작위로 엉터리 졸업장을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많은 한국 대학교 어문계열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학생들도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졸업시즌이 되면 내 연구실에서 울고 나가는 학생들이 많다. 실력이 안 되는 학생은 졸업시험을 죽어도 통과시켜줄 수없다는 우리의 방침에 선처(?)를 호소하러 오는 학생들이다. 그렇게 누누이 졸업시험 미통과자는 절대 졸업시키지 않겠다고 말해오건만 학생들은 저마다 피치 못할 기구한 사연이 있다. 제발 졸업만은 시켜주시면 안 되겠냐는 사정에서, 누구 인생 망치려고 작정을 했냐는 은근한 협박까지 유형도 다양하다. 나는 이런 난감함을 접할 때 마다 어문계열 전공이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외국어 구사능력조차도 없이 졸업을 할 수 있다는 만연한 대학교육의 나태함과 이를 묵인하는 있는 사회적 공감대를 제삼 확인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인가? 이러한 현실이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가? 이제까지 잘 해오고 있지 않은가? 그런 교육 환경 속에서도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비약적인 발전을 해 왔는데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으냐고 할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단호하게 이를 부정한다. 우리는 직무를 유기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그 피해는 다양한 사람들이 짊어진 체 가고 있으며 앞으로는 그 피해가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대학과 교수와 구성원들이 유기한 교육으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점이 이제까지 묵인되어 오고 있는데 이것이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무사안일과 무책임함을 더 이상 지속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소신이다. 우리나라 대학이 안일하다는 통렬한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대학에서 온전히 하지 못한 교육이 필연적으로 누군가에 의하여 더욱 비싼 대가를 치루며 이루어졌기에 오늘날의 우리가 있었다. 다시 말해 대학의 방만함을 결국은 어디 다른 곳에서 더 큰 희생으로 메우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변화는 오늘날에 이르러 또 다른 차원의 변화가 아닌 변혁을 해야 할 시기를 맞고 있다. 적당히 각자의 노력으로 대학이 해야 할 부분을 어찌어찌 메울 수 있는 세계 지식자본사회에서의 발전의 한계는 여기까지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성실과 노력이라는 엄청난 인성을 바탕으로 언어능력 정도만을 가지고서 해외에 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 휴대폰, 자동차를 팔아서 우리의 경제를 이만큼 끌어올렸다고 한다면, 이제는 단순히 그런 것을 파는 시대가 아니고 냉장고 세탁기를 만드는 기계를 파는 시대로 바뀌어 갈 것이다. 아니 기술에서 자본의 경제로 바뀌어가고 있다. 더욱 다양하고 복잡해져가는 국제관계속에서 그들의 정서적인 배경과 역사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가 없이는 더 이상의 발전적인 국제협력이 한계에 이를 것이다. 결국 진정한 의미의 특화된 국제 전문가 양성을 필요로 한다. 돈 벌기 위한 대학교육이라는 극히 현실적일 수 있는 부분에서만도 상황이 이렇다. 우리의 논의에서 이러한 현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전에는 외국어를 잘 구사할 수 있는 전문가 정도로 이끌어 갈 수 있는 한국의 발전이었다고 한다면 앞으로는 그 정도 가지고 어림도 없다. 세계정치와 경제구조에서 한국이 필요로 하는 인재는 언어적인 기능을 기본으로 한 구체적인 분야에 대한 이해와 분석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이것은 우리의 교육 목표를 수정해야 하고 교육의 질에 있어서도 적당히 놀고 즐기는 분위기만이 대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던 편안함을 재고하여야 한다는 자연스런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 국제전문가가 새로운 상대적인 부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든, 아니면 불평등하고 부정의한 부를 재분배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가의 논의를 차치해 놓고서라도 말이다. 대학과 사회는 진지한 태도로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 이런 글을 쓰면 대학교 교수 중에 필자에게 욕 안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 나부터라도 이의를 제기하고 반발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나름대로 현실의 상황에서 열심히 연구하고 교육하려는 구성원들이 왜 없겠는가. 그들을 싸잡아 비판을 하며 노력과 정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조를 변화시키기 전에는 그러한 노력이나 정성이 그 빛을 발하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지극 정성으로 병자를 간호한다 하여도 살을 도려내는 수술을 선택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환자에게 큰 도움이 안 될 수 있다. 이래서 수술을 할 수 없고, 저래서 나도 많이 고민해 보았다는 말은 변명 밖에 안 될지 모른다. 이 상황에서 혼신으로 병간호를 하는 사람입장에서 이런 글을 읽으면 맥빠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수술이 필요하다. 현실과 조직은 우리의 발목을 너무 꽉 조이고 있다. 어쩔 수 없다고 주저앉는 동안 우리나라의 대학은 만연한 매너리즘에 빠지고 누구하나 나서서 움직여 볼 엄두가 안 나게 만든다. 그러나 대학은 수술이 필요하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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