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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22 19:30 수정 : 2006.10.22 19:30

윤흥길의 <완장>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제복이나 완장을 착용하면 왜 사람들은 갑자기 위압적이 되고 거친 말을 사용하며 부당한 요구를 하게 될까? 우리은 왜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눅이 드는 것일까? 한겨레 자료사진

문학 속 철학산책

윤흥길의 <완장>을 통해 본 ‘권력’의 의미

“일찍이 그대들은 원숭이였다. 그러나 그대들은 아직도 어떤 원숭이보다 더한 원숭이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니체의 말이다. 1982년 3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현대문학>에 연재되었던 윤흥길의 <완장>은 우리가 아직도 지니고 있는 바로 이 원숭이다움을 풍자성이 강한 전라도 사투리와 우리민족 특유의 해학성으로 잘 살려낸 작가의 대표적 장편이다.

소설은 전북 이리시(지금 익산시)에 공업단지가 들어서던 시절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시골 농부에 불과했던 최씨는 땅 투기에 손을 대 갑자기 큰 돈을 번다. 그 힘으로 저수지 사용권을 얻어 양어장을 만들고, 동네 건달인 종술에게 관리를 맡긴다. 종술은 어려서부터 객지로만 떠돌면서 쌈질로 잔뼈가 굵은 건달인데, 처음에는 최사장의 제안을 거절하지만 ‘완장’을 차게 해준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 관리인 자리를 맡는다. 일제강점기, 6.25사변, 자유당독재시절을 거치면서 위세를 떨쳤던 완장이 가진 힘과 권력을 어려서부터 듣고 보아왔기 때문이다.

완장을 찬 종술은 곧바로 대단한 권력이나 가진 양 안하무인이 된다. 낚시질 하던 남녀들을 잡아 기합을 주기도 하고, 몰래 물고기를 잡던 초등학교 동창과 그 아들에게 폭행을 가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저수지가 아닌 읍내에 갈 때조차 완장을 두르고 활보한다. 급기야는 자신을 고용한 최 사장 일행의 낚시질까지 금지하려다가 결국 관리원 자리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일찍이 완장의 허황됨을 일깨워주던 술집작부 부월이의 충고를 받아들여 마을을 떠난다.

<완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는 두 가지이다. 우선, 제복이나 완장을 착용하면 왜 사람들은 종술이가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위압적이 되고 거친 말을 사용하며 부당한 요구를 하게 될까? 또 왜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눅이 드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과 연관하여 살펴볼 때 매우 흥미로운 심리학 실험이 있다.


짐 바아도 박사의 ‘모의 형무소’ 실험이다. 1972년 실행된 이 실험은 형무소 개혁을 위해 미 국회 소위원회에 구두로 보고 된 바 있으며, <엑스페리멘트>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짐 바아도 박사는 신문광고를 통해 형무소 생활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에 참가할 정신적으로 건강한 남학생 지원자 24명을 구했다. 그 다음 그들을 무작위로 골라 일부는 죄수, 나머지는 간수로 나누어 각각의 역할을 맡겼다.

형무소는 스탠포드대학 심리학과 교실 지하복도 35피트를 막아 만들었다. 모든 상황도 실제 교도소와 유사하게 꾸몄다. 그 안에서 학생들은 이 주일 동안 각자가 맡은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실험동안 금전적 보수 뿐 아니라 충분한 식사, 의복, 의료 및 잠자리를 보장한다는 서약도 했다. 그리고 누구든 본인이 원하면 즉시 그만둘 수 있다는 것도 알렸다.

짐 바아도 박사는 형무소와 똑같은 조건에서 간수와 죄수의 심리작용, 곧 권력과 무력, 통제와 억압, 지배와 저항, 권위와 복종 등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놀라웠다. 약간의 예외는 있었지만, 두 집단이 보인 반응이 너무나 격렬했고 나타난 부작용이 예상 외로 커 불과 엿새 만에 실험을 그만 두어야만 했다. 실험에 참가한 대다수가 종교나 도덕관, 신념 또는 가치관에 상관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 이끌려 삽시간에 변하더라는 것이다.

실험이 진행되자 간수 역을 맡은 사람들 중 대부분이 갑자기 잔혹한 사디스트(상대에게 고통을 주면서 쾌락을 느끼는 사람)적 성향을 많게든지 적게든지 보였다. 반면에 죄수 역을 맡은 사람들의 상당수는 겁에 질려 천박하고 복종 잘하는 마조히스트(상대에게 고통을 당하면서 쾌락을 느끼는 사람)적 경향을 보였다. 그것이 실제 상황이 아니고 스스로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는 단순한 연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맡은 역할, 제복, 그리고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변모시켜버리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윤흥길의 <완장>이 우리에게 던진 두 가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이미 얻었다. 짐바아도 박사의 대답인즉, 인간의 행동은 전적으로 그가 사회에서 맡은 역할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사디스트, 마조히스트의 모습들이 권력이라는 거울에 비추인 우리의 가련한 실상,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인간의 진실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완장>의 주인공 종술은 별나거나 나쁜 사람이 아니다. 누구든 완장을 차면 자기가 행사하고 있는 통제와 권력을 즐기기 때문에 사디스트가 된다니까 말이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은 이와 다르게 해석했다. 그는 비록 “몇 사람” 또는 “소수”라고 하지만 죄수들을 규칙에 따라 공정하게 대하고 사디스트적 기질을 보이지 않은 간수도 있었고, 억압적인 분위기를 잘 견디며 마조히스트적 부작용을 보이지 않은 죄수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실험은 오히려 사회적 힘이 그렇게 간단하게 사람을 사디스트나 마조히스트로 변모시킬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주어진 어떠한 환경에 놓이더라도 자기의 태도를 선택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종술은 크게 잘못된 사람이다.

그럼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우선, 우리 사회에서 완장을 찬 사람들은 누구일까? 또 그 완장에 겁이 질려 천박하게 복종을 하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생각해보자! 누구든 자기가 행사하고 있는 통제와 권력을 즐기기 때문에 그것에 몰두한다면, 그가 곧 종술이처럼 완장을 찬 게 아닐까? 또한 누구든 그러한 통제와 권력에 주눅이 들어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쉬 포기하고 복종한다면, 그가 바로 모의 형무소에 수감된 죄수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한번 생각해보자!

김용규/자유저술가, <지식을 위한 철학통조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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