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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22 20:11 수정 : 2006.10.22 20:11

아낌없이 주는 나무

윌리암 워즈워드의 시에 ‘아이들은 어른의 아버지’라는 구절이 있다. 어른과 아이들을 교묘하게 대비시켜 놓은 이 한 구절에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상징이 숨어 있다. 시의 앞 구절에는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뛴다’고 되어 있다. 무지개를 보며 어린 아이가 가졌던 순수하고 가슴 뛰는 순결함이 없다면, 즉 어린이의 마음을 잊어버린 어른은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말이, 그 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핵심이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 정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의 말이 그렇다. 몇 주 전,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 몇 분이 가족을 데리고 우리 시골집에 찾아오신 적이 있었다. 이곳저곳 둘러보다 저녁 무렵,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게 됐다. 살짝 익은 고기를 기름 소금에 찍어 입에 넣으니 살살 녹는 것 같았다. 모두들, 이것이 진짜 쇠고기 맛이라며 감탄을 하고 있는데, 엄마를 따라 같이 온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 하나가 쇠고기를 한 점 먹더니 중얼거렸다. “쇠고기는 돼지고기보다 맛이 멍해.”

아이의 말을 듣고 우리 모두는 아이 말대로 정말 머리가 멍해졌다. 아무도 고기 맛을 멍하다고 표현할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돼지고기보다 쇠고기 맛이 더 담백하고 부드럽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아이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언어, 쇠고기와 ‘멍하다’를 결합해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어린아이는 언어의 틀에 갇혀 있지 않다. 그래서 자신이 아는 언어들을 거리낌 없이 결합해 새 언어를 만들어 낼 줄 안다.

우리 큰 아이가 어렸을 때였다. 막 말을 배울 때였는데, 아이를 안고 마당에 나가 화단에 호스로 물을 줄 때였다. 갑자기 아이가 종알거렸다. “나무는 슬퍼. 그래서 울어.” 물을 뿌려주자, 나뭇잎에서 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는데, 그것을 보고 이제 겨우 말을 배우는 아이가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아이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시의 한 구절같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시인이 언어와 언어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훈련된’ 존재라면, 아이들은 ‘훈련되지 않은’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점점 사회적 언어, 일상적 언어를 학습하면서, 어린 아이였을 때의 언어적 감성을 잊어버린다. 잊는 것만이 아니라, 그 어린 시절의 언어에 대한 그리움도 없어져 버린다.


가을이다. 붉게 물든 교정의 나무 그늘 아래서 한 편의 시를 읽는 아이를 만나고 싶다. 가을 하늘의 그 아득한 푸르름을 시로 쓸 줄 아는 아이를 만나고 싶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시를 읽지 않는다. 시가 독자로부터 멀어진 것은 어쩌면 우리의 문학 교육에 문제가 있어서일 것이다. 아, 그 많던 어린 시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최성수/서울 경동고 교사 borisog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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