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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여행’보다는 그곳에 ‘도착’해 무엇을 할 지 계획하며 기대에 부푼다. 여정 자체가 목적인 수학여행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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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유, 논술 /
경주냐 제주도냐, 아니면 일본이냐 중국이냐. 봄 가을이면 떠나는 수학여행은 학년 단위로 치르는 학교의 최고 행사다. 행선지와 일정을 묻는 설문조사를 여러 차례 할 때마다 학생들의 마음은 풍선처럼 날아간다. 어디라면 어떠랴. 수학여행은 단연 학창시절의 꽃이다.
우리나라의 수학여행은 언제부터였을까. <학교의 탄생>에 따르면, 근대 학교의 본격적인 수학여행은 1910년대부터였다고 한다. 그 이전에도 일상의 학교수업에서 벗어나 하루 정도 원족(遠足, 요즘의 소풍)을 가는 일은 흔했다. 그러나 전국을 하나로 이어준 철도망 덕분에 하루가 아닌 6박7일의 일정이 시도되었다. 평양으로, 금강산으로, 경주로, 만주로.
예나 지금이나 친구들과 함께 낯선 곳을 여행하는 일은 가슴 콩닥거리는 일이다. 게다가 합법적 보호아래 진행되니 마음도 편하다. 하지만 초창기 수학여행의 전성시대를 맞았던 1920년대의 모습은 요즘과는 사뭇 달랐다.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원족이건 수학여행이건 ‘민족의 재발견’이 목표가 됐다. 식민지의 학생들은 군인이 행진하듯 양팔을 씩씩하게 휘두르며 걸었다. 도착지에서는 나라를 생각하며 연설문을 읽고 애국가를 부르고 만세를 외쳤다. 애국심을 기르는 국토순례 의식이었기에 걷고 적고 기록했다. 강화도에서 단군왕검을, 개성에서 고려왕조를, 경주에서 찬란했던 신라를, 금강산에서는 민족의 전설과 설화를 담아 와야 했다.
지금도 여전히 수학여행은‘놀러’가는 것이 아니다. 뚜렷한 교육적 기대가 묻어 있다. 역사도 보고, 지리도 보고, 자연도 보고, 문화도 보아야 한다. 소풍에서는 많이 퇴색되었지만, 수학여행은 명분이나마 ‘수업의 연장’이다. ‘입시’가 중요한 시대에 맞게,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체험하고 확장시키는 것이 1차 목표다. 그러나 학생들의 생각도 그럴까. 학생들의 관심은 낮보다는 밤에 있다. 무얼 먹을까, 어떻게 보낼까를 꼼꼼하게 친구들과 계획하고 준비한다. 밤에 쌓인 피로는 버스에서 잠으로 해결하고, 교사는 학생들에게 들러붙은 잠귀신을 쫓느라 진을 뺀다. 여행 이틀째부터 보이는 일반적 모습이다.
어쩌면 인간의 역사는 여행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옛 신화의 주인공 ‘길가메시’는 영원한 삶을 찾아 여러 지역을 헤매고 여행한 뒤 우루크의 왕이 됐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장중한 모험도 마찬가지다. 전설과 역사가 뒤섞인 고대의 신화에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비밀을 알고 싶어하는 인간들의 ‘여행’이 가득하다. 여행은 문명과 인간 정신의 모태인 셈이다.
누구나 떠나는 게 여행인만큼, 여행을 거창한 시각에서만 볼 필요는 없다. 세상 사람들은 점점 더 여행을 원하고 감행했다. 고대 로마는 여행의 전성시대였다. 군인과 공무원은 통치를 위해, 학자들은 여행을 기록하기 위해, 병자와 일반인은 온천욕을 위해, 교양인들은 그리스 유적을 관람하기 위해 너도나도 여행을 떠났다.‘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이’ 로마의 체계적인 길과 도로는 광대한 영토 안의 사람들을 빠르게 왕래시켰다. 그 안에서 서로의 편견이 제거되고 세상을 보는 다양성이 하나로 융합되었다. 오래된 문화 형성의 한 축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매주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사람들은 일생에 한 번 여행을 했다. 중세 아랍의 이븐 바투타는 인도와 중국을 여행하는 데 25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마르코폴로도 베네치아를 떠난 지 24년 뒤에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현장 법사의 구법여행은 16년, 혜초의 5천축국 여행은 7년이 걸렸다. 중세 초기 기독교인들의 예루살렘 순례는 종교적 이념을 수행하는 방편이었고, 기독교는 고대에서 중세로 가는 다리가 되었다. 여행은 느리고 불편하고 힘든 모험이었으며, 그래서 여행은 곧 인생이었다.
여행이 학문에 기여한 바도 눈여겨 볼 만하다.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에 갔다온 덕분에 진화론을 완성했다. 루소의 스위스 여행은 <신엘로이즈>를 낳았고, 몽테뉴의 유럽 종단 여행은 <수상록>으로 남았다. 에라스무스는 스스로를 ‘세계시민’이라 부르며 유럽을 돌았고,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 덕분에 독일은 고전주의 문학을 얻었다. “인간은 여행을 즐거워하고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존재”라는 플리니우스의 말처럼, 예술과 학문은 여행을 통해 성숙해져 왔다.
<강철군화>의 작가 잭 런던은 1904년 한국에 방문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의 특성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호기심’이다. 한국 사람들에게‘구경거리’는 최고의 즐거움이다. 아주 사소한 어떤 사건이라 할지라도 몇 시간이 걸려도 이들은‘기웃거리느라고’서 있거나 구부리고 앉아 있다.” 호기심이야말로 죽은 사물도 살아있게 만드는 가장 큰 무기다. 선조들의‘구경할 줄 아는 능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현대의 여행은‘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 여행은‘상품’이 되었고, ‘관광사업’은 독립적인 경제분야로 확대되었다. 사람들은 느리게 느끼는 여행보다 빠르고 체류지가 확실하며 편리한 여행을 좋아한다. 이제 우리들은 추위와 더위뿐 아니라 바다와 공기, 태양도 도착한 곳에서만 체험한다. 우리들의 여행은 단체로 움직이고, 이윤과 함께 이동하며 이루어진다. 괴테 시절의 사람들은 “도착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기 위해 여행”했지만, 우리 학생들은 더 이상 ‘여행하지 않고 도착한다.’ 올 가을도 어김없이 수학여행지는 북적인다. 차 안에서 잠자다 내리는 학생들에게 얼마큼의 인생여정이 깊어졌을까 궁금해지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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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하나씩 친구와 나누는 20분간의 대화>
1. 한국 사람들은 여행 중에 ‘사진찍기’에 아주 많은 정성을 쏟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지 이야기해 보자. 2. 고대 로마의 여행자들도 이집트 파라오 무덤에까지 가서 많은 낙서를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유명한 유적지에 이름과 날짜를 적어대는 이유는 무엇일까?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해보자. 3. 흔히 여행을 ‘책 중의 책’이라 비유한다. 이 말의 의미와 이유를 생각해 보자. 4. 사람들은 혼잡한 거리에 있을 때보다 자연을 마주할 때, 차 안에서보다 산책할 때 ‘노여움과 불안’을 덜 느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자. 5. 여행담은 체험기록을 넘어설 때도 있다. <걸리버 여행기>와 <유토피아>를 읽어보고, 서술 방식에 숨은 작가의 의도를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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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장을 잘 다듬으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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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정/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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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를 다른 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와 “그 질문이 이 문제와 어떤 관계가 있나요?”를 사용해 보세요. 전자는 견해와 관점에 대하여, 후자는 관점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하여 성찰하게 해줍니다. 권희정/상명대부속여고 철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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