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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전 경기도 성남 대한교과서(주) 공장에서 관계자들이 부산지역에 배부될 200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문제지와 답안지를 트럭에 옮기고 있다. 수능 문답지는 시험 당일인 16일 아침까지 시험지구별로 보관되다가 971개 시험장으로 옮겨지며 경찰이 철저하게 호위할 예정이다. (성남=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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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추웠다. 나는 '그 날' 을 세 번 겪었다. 그 날은 바로 '수학능력시험날' 이다. 2000년 수능시험은 비교적 평이했다. '01년 수능시험은 무수한 고득점자를 양산했다. '02년 시험은 언어영역이 유독 어려웠고, 평균점수가 50점 가량 하락했었다. 이른바 삼수를 한 셈이다. 점수 인플레로 인해 낙방했던 '01년, 나는 정말 절망했다. 모든 게 도로였다. '00년 기준으로 최상위 그룹이 맞는 점수를 기록했으니 들뜰만도 했다. 그러나 희망은 잠시였다. "평균 점수가 50점 이상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 며 절망에 빠뜨렸던 어느 방송사 기자가 했던 말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맴돈다. 나는 참고서를 찢어 버렸다.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던졌다. 울었다. 포기한 사람처럼 방황했다. 명문대 로고가 찍혀있는 대학노트와 필기구, 뱃지 등은 나를 나락으로 밀어냈다. 나름대로 노동했던 지난 시간들이 영상처럼 휙 지나갔다. 서러움이 복받쳤다. 울컥하는 서러움은 당사자가 아니었던 사람은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고3 시절, 놀지 않고 공부했던 시간이 나를 배반했다는 알 수 없는 증오감이 가득 찼다. 결론은 내가 시험을 망쳤다는 것 뿐이었다. 지나간 '시간' 과 내 '노동' 에 대한 보상은 오직 내게서 구해야만 할 것이었다. 수능 일주일 전, 나는 인사불성이 된 채로 귀가했다. 한 달에 평균 10회 이상 음주를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는 하다. 나는 삼수생이었다. 저녁 무렵까지 대충 공부를 했으며, 이후 시간에는 음주를 했었다. '01년, 신촌에 '지푸라기' 라는 민속주점이 있었다. 연대 근처에 있는 주점이었다. 항상 북적거렸다. 고객은 물론 '연세대학생' 들이었다. 나 외 3명은 일주일에 두 세번 그 곳에를 갔다. 구석에서 누군가를 씹었다. 주인 아저씨는 우리가 가는 날이면 서비스를 주시고는 했다. 김치전과 과일 소주였다. 누군가를 한참 씹다가 술김에 붙은 적도 많았다. 결론은 한가지였다. "우리도 대학가자" 였다. 참고로 그 민속주점은 현재 갈비집으로 업종이 변경되었다. 아쉽다.
웃긴 건, 수능 이틀 전에도 과음을 했다는 것이다. 더 웃긴 건, 결과가 좋았다는 것이다. 이틀 전에 마신 술로 인한 숙취가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시험을 봤다. 당시 어려웠다는 평가를 받았던 시험이었고, 나는 또다시 패닉 상태였다. 시험이 끝난 후,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고 전신에 힘이 빠졌다. 집과는 연락을 두절했다. 부모님 뵐 면목이 없었다. 술 값으로 날린 돈과 '지푸라기' 에서 행패를 부렸던 지난 기억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다. 노력을 하지 않았던 나는 당연히 기대를 하지 않았다. 젊고 순진했던 나는 '노력없이 결실없다' 는 명언을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결과는 충격이었다.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신에게 감사했다. 상대적으로 고득점을 기록한 것이었다. 서울대는 못 가더라도 연고대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나는 생각을 바꿨다. 나는 충분히 고득점을 맞을 자격이 있다라고 생각을 했다. 열심히 노력을 했으며, 지난 내 시절은 누가 보아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라는 최면을 걸었다. '노력없는 결실' 은 있을 수 있다. 나는 결코 노력하지 않고 고득점을 쟁취했다. 타락은 시작했다. '노력과 결실' 에 대해 믿었던 소박한 진리는 나를 배반하고 떠나갔다. 노력없는 결실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도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얄팍한 불의는, 나를 들뜨게 했다. 나는 처음 수학능력시험을 치뤘던 그 날을 기억한다. 불안감에 잠을 못 이루었던 소중했던 2000년, 수능 전 날을 기억한다. 혹시라도 시험장에 늦을까봐 노심초사했던 그 날을 기억한다. 기억력 감퇴를 우려하여 커피가 아닌 녹차를 마셨던 그 날을 기억한다. 보온병에 따뜻한 보리차를 담았고, 수리탐구 2영역 문제를 생각했던 그 날을 기억한다. 졸음이 올 것을 우려하여 어머니에게 채식 반찬으로만 도시락을 챙겨 줄 것을 '당당히' 요구했던, 고3 수능 전 날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다시는 오지 않을 '그 날' 을, 나는 그리워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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