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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1.20 11:47 수정 : 2006.11.20 11:52

“교수님 취직을 해서 이번학기 출석을 못할 것 같습니다.”

졸업을 앞둔 학생이 담당교수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수업을 못 나오더라도 적당히 시험은 리포트로 대치해주고 학점을 달라는 소리다. 그래서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거북하기 그지없다. 취업하는 것이 지상목표인 요즘의 학생들에게 취직이라는 목표를 달성했으니 대학의 공부는 안중에도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회사나 사회가 생각하는 것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대학에서 뭐 가르치는 거 있나! 당연히 우리 회사에 취직을 시켜주었으니 조금 남은 한 학기 과정 정도야 회사에 와서 일을 배우는 것이 수업을 받는 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연예인 학생이 대학에 입학하고 수업은 들어오지도 않으면서 학점을 받아가는 현상도 이와 별 다르지 않다. 대학이 뭐 대단한거 가르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졸업장을 가진다는 것이 그나마 의미가 있으니, 혹은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이미지상 유리하니까 대학이라는 곳을 다닌다는 폼을 잡는 것이다. 수강신청은 했지만 그 유명하신 분이 별 배울 것 없는 수업에까지 나오셔서 고생을 할 것을 바라는 것은 애당초 무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취직도 못하고 연예인이 되어서 대놓고 수업에 참여하지 않아도 학점이 꼬박꼬박 나오는 특혜를 가지지 못한 보통학생(?)들은 그 별 볼일 없는 강의가 휴강을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많은 대학이 가진 현실이다.

이 정도 되고 보면 도대체 대학이 무엇을 가르치기에 그 가르치는 것이 회사에 들어가는 것보다, 연예활동을 하는 것보다 혹은 휴강을 해서 노는 것보다 절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가? 도대체 이런 분위기와 사회적인 공감대는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누구의 책임이란 말인가? 이런 질문을 안 해 볼 수 없다.

때에 따라서 수업을 받는 것이 다른 것들보다도 덜 중요할 수 있다. 열 번의 강의보다 한번의 현장 경험이 더 의미 있을 수 있고, 수업 한 시간보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는 것이 인간에게 더욱 심오한 것을 심어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만연해있는 대학 수업의 가치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다. 당연히 문제의 원인이 단순하지만은 안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와 문화적인 요소로 얽혀진 복잡하고 상호 유기적이며 총체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의 가장 큰 원인, 혹은 해결책을 교수들에게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원인이 교수들의 안일과 매너리즘에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소위 ‘최고의 지성’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가진 교수집단이 이러한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바꾸어 나아가는 주체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교수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3700가지 변명이 있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아무리 중요한 이야기를 해도 그것이 돈 되는 것과 관련 없으면 고개를 돌린다는 현실이 존재한다.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고 뭐든지 금방 실증을 느끼는 신세대의 사고 또한 쉽지 않은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입시위주의 교육배경과 취업위주의 목표의식이 강의의 의미를 더 이상 진리탐구에 두지 못하게 변질시켜버렸다. 영리추구가 공공연한 목표가 되어버린 듯한 대학행정을 갑갑하게 느껴보았던 것도 사실이다. 국가의 교육정책이 문제라서 대학교가 이렇게 밖에 될 수밖에 없다는 원망도 설득력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리들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가장 먼저 반성해야할 사람들은 교수들이다.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기에는 최고의 지성집단이라는 수식어가 너무나도 무기력하고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그런 것을 변명삼기에는 이제까지 소위 ‘대학교수’라고 폼을 잡는 위세가 부끄럽지 않은가 말이다.

대학교에서 학교의 사회적인 인지도를 높이기 위하여 연예인들에게 엉터리 졸업장을 남발한다면 이것을 부당히 여겨 작은 힘이라도 모아 학교 당국에 맞서 이의를 제기 할 사람들이 교수가 되어야 한다. 졸업을 앞둔 학생이 어떻게든 학교 수업만큼은 끝까지 듣고 취직을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게 할 지적, 제도적 책임이 교수에게 있다.

교수님이 오늘 수업에는 도대체 어떤 새로운 것을 나에게 느끼게 해줄까라는 기대감으로 수업에 임하게 해야 할 책임이 각 교수 개개인에게 있다는 점은 너무도 극명하다. 그리고 그렇게 교수의 기본적인 역할에 충실해진다면 대학에 적을 두고도 수업에 안 들어가도 되는 분위기가, 그리고 휴강을 즐거워하는 학생의 수가 오늘날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 이러한 문제를 우리나라의 모든 대학과 모든 학과 그리고 모든 교수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우리나라의 많은 대학이 최소한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의도를 이해하고 이러한 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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