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6.12.03 17:39 수정 : 2006.12.03 17:39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를 통해 어떤 것의 의미와 가치는 오직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에 의해서만 생겨난다고 말한다. <생텍쥐페리-지상의 어린왕자>(시공사) 중에서

문학속 철학 산책

(어린 왕자)를 통해서 본 ‘만남’의 의미

도시는 오늘도 사람들로 가득 차 부산하고 소란스럽다. 그런데도 사막 같다. 우리는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과 만난다. 그런데도 외롭다. 그래서 묻게 된다. 우리는 만나지만 우리가 만났을까? 1931년 발표된 이래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작품이다.

소설은 비행기 고장으로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와 자기가 살던 별을 떠나 지구에 온 어린 왕자가 만나면서 시작한다. 조종사는 어렸을 때 코끼리를 삼킨 거대한 보아뱀을 그려 어른들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 그림을 보아뱀으로 보지 않고 모자로만 보았다. 그래서 그는 화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조종사가 되었다. 어린 왕자는 자기의 별을 떠나 여러 혹성들을 방문했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둘은 모두 외롭다.

생텍쥐페리는 이들을 통해 사람이 외로운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진정한 만남이 없어서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린다. 또한 진정한 만남이 없는 모든 장소가 곧 사막이라는 것, 그래서 도시도 사막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고 보면 슬며시 의심이 간다. 조종사와 어린 왕자가 만난 곳이 정말로 사막일까?

장미가 5천 송이나 피어 있는 정원, 승객을 천 명씩 실은 특급열차가 달리는 역, 갈증을 없애는 약을 파는 장사꾼이 있는 곳이 과연 사막일 수 있을까? 조종사와 어린 왕자가 찾아낸 우물도 의심스럽다. 그 우물은 마치 마을의 우물처럼 도르래와 두레박, 밧줄 등이 준비돼 있었다. 그렇다면 그곳은 사막이 아니라 혹시 우리가 사는 도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면서도 아무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하는 바로 이곳이 아닐까?

그런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또 왜일까? 왜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면서도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걸까? 그래서 도시에 살면서도 마치 사막에 떨어진 것처럼 외로워하며 사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을 통해 우리는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만남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이르게 된다.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서 그 대답을 듣는다. 우리가 외로운 이유는 한마디로 서로 길들이지 않아서라는 것이다. 여우는 길들인다는 것이 수많은 사람 가운데 오직 한 사람, 수많은 여우 가운데 오직 한 여우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네 장미를 그렇게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네가 장미를 위해 정성 들여 쏟은 시간이야”라고도 한다. 곧, 여우가 말하는 ‘길들이기’란 다름 아닌 ‘관계를 맺기’, 또는 ‘사랑하기’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상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 어떤 것이 소중한 것은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상대가 있을 때뿐이라는 것, 곧 어떤 것의 의미와 가치는 오직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에 의해서만 생겨난다는 것이다.

같은 말을 유태인 랍비이자 철학자였던 마르틴 부버는 그의 저서 <나와 너>에서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고 했다. 그는 모든 관계를 ‘나―그것’의 관계와 ‘나―너’의 관계로 구분했다. ‘나―그것’의 관계란 1인칭과 3인칭만의 관계를 말한다. 모든 3인칭 대상들은 나에게 다만 파악될 뿐 응답하지도 않고 나를 배려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에게 ‘그’는, 그리고 ‘그’에게 ‘나’는 사실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이나 같다. 이런 세계는 ‘사물들의 세계’이자 ‘무의미의 세계’, 곧 사막이다.

하지만 만일 1인칭인 ‘나’가 3인칭인 ‘그’와 어떤 관계를 맺을 때, 드디어 ‘너’라는 2인칭이 기적처럼 탄생한다. 또한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서로 ‘너’라고 부르는 관계, 다시 말해 ‘나―너’의 관계가 생겨난다. 그리고 비로소 서로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응답하며 배려하게 된다. 그 결과 세상은 ‘사물들의 세계’에서 ‘의미와 가치의 세계’로 변하게 된다. 그렇다면 2인칭이란 ‘관계의 인칭’이자, 사물의 세계를 의미와 가치의 세계로 바꾸는 ‘기적의 인칭’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이 왕궁처럼 호화로운 집 안에 홀로 있다고 하자. 그는 스스로 왕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존재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만일 그가 평생을 그렇게 홀로 지낸다면 그의 존재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는 집 안에 놓인 탁자나 의자, 책상, 옷장, 거울 등과 같이 단지 하나의 존재물일 뿐, 왕이라는 그의 존재의 의미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그를 왕으로 섬기는 신하 앞에서만 그는 왕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내가 있어 비로소 남편이 있는 것이고, 아이가 있어 비로소 부모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말을 부버는 “‘나’는 ‘너로 인해 ‘나’가 된다”라고 표현했다.

김용규/자유저술가, 〈도덕을 위한 철학통조림〉 저자
이제 모든 것이 드러났다. 우리는 상대를 ‘나―그것’의 관계로는 만나지만 ‘나―너’의 관계로 만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도시가 사막 같고, 우리가 외로운 것이다. 어린 왕자가 말하는 ‘길들이기’, 부버가 말하는 ‘나―의 관계를 맺기’,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하기, 이것만이 사막에 샘을 터뜨리고 외로움이라는 악령을 사라지게 한다는 말이다. 오직 그것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세상을 세상답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과 세계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드러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누구든 사막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어떤 것을 길들이라는 것이다. 어떤 것과 ‘나―너’의 관계를 맺으라는 말이다. 어떤 것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같은 말을 어린 왕자는 “내가 어느 별에 있는 그 꽃을 좋아하게 되면, 밤에 하늘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달콤해지지요”라고 했다. 과연 그런가? 생각해보자!

김용규/자유저술가,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저자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