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지만, 설마 했다. 일본 잡지에 실린 한승조씨의 글 원문 중 몇 구절을 우리 언론에서 선택적으로 인용하여 그것을 침소봉대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한씨의 글을 읽었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믿어지지 않았다. 참으로 불결하고 불길한 내용이었다. 분노나 분개만으로는 모자라는 그런 감정이 끓었다. 어떤 분은 ‘궁이 답답하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뼛속에 휑한 바람이 들고, 무엇인가 깊은 어둠 속으로 한없이 빠져드는 듯했다.
한승조씨의 학력과 경력이 너무 화려했기에 참담함은 더했다. ‘민족' 대학을 졸업하고 ‘민족' 대학의 교수로 30년 가까이 봉직하다가 정년 퇴임을 했고, 지금은 ‘명예’ 교수이며, 세 차례나 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민족을 처참하게 능멸한 것이다. 게다가 국민윤리학회 회장에다가 한국정신교육중앙협의회라는 단체의 회장이라는 직책까지 맡았었다는 것이다. ‘국민 윤리’니 ‘정신 교육’이니 하는 말에 속이 또 느글거렸다.
도대체 대한민국이 어떤 사회이기에 이토록 철저히 반민족적인 역사관과 가치관을 가진 인물에게 온갖 영광과 명예를 바쳐 왔단 말인가. 광복 60년을 맞는 우리의 현실이 아직도 얼마나 비열한 허구들로 득실거리고 있는가.
그의 가문이 식민지 치하에서 일제로부터 얼마나 많은 혜택을 입고 커다란 축복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정신대 할머니들을 향하여 ‘치사하고 못난 짓을 하고 있는 소수의 노파’라는 표현을 어찌 할 수 있단 말인가.
3·1운동 때 희생자가 1천명도 안됐을 거라면서 더 많이 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한다고도 했다. 3·1운동 당시 사망 7509명, 부상 1만5961명, 검거자 5만2770명, 불탄 민가가 715채라고 하는데 7500명의 목숨이 적다면 도대체 얼마나 더 죽었어야 한다는 말인가?
소를 기르는 사람이 육질을 좋게 하려고 인삼 녹용을 먹였다고 소를 보고 네 주인에게 고마워하라고 한다면 소도 기가 막혀 웃을 것이다. 철도를 놓고, 항만을 건설하고, 농지를 정리한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일본은 이 땅을 영원한 자기네 영토로 여기고 철저한 착취를 위하여 침을 발라 놓았던 것 아니었나.
최소한의 품격과 민족적 자존심을 학문적 소신까지 내세워 포기한 한승조씨와 그들. 그러나 이러한 한승조들의 왜곡된 소신과 망언은 역설적이게 이제라도 욕된 역사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로 퍼져 가고 있다. 한승조들의 패륜이 비겁 속에 잠자는 대한민국을 흔들어 깨우고 있고, 민족의 정체성을 되살리라는 절규로 들려 오고 있다. 지금 고딕체로 대문자로 외쳐대고 있지 않은가. 과거사의 청산은 겨레의 통일을 준비하는 일이기도 한 것, 민족 정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들의 기본적인 자존심만이라도 지켜 가라는 엄한 죽비 소리이기도 하다.
서울 한성여중 교장 soam88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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