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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에나 교육은 사회의 요구를 담고, 시험은 학습 상황을 평가한다. 오늘, 시험이라는 괴물과 씨름하는 우리 학생들은 그 결과를 내면의 일곡으로 삼아 성장하고 있을까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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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유, 논술 / 기말고사가 한창이다. 학생은 달라져도 시험 치는 모습은 늘 똑같다. 한 올의 머리카락이라도 흘러내릴세라 바짝 묶어 올리고 문제 풀기 삼매경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분주한 눈동자와 손 사이로 시험지 넘어가는 소리만 바스락 거린다. “앗차!/시험문제를 보니 한숨이 먼저 나네/어젯밤에 한 번 더 볼걸!/연필은 가졌건만 종이는 하얗을 뿐/시계의 바늘은 좀 잡아놓았으면./아아 종을 친다 어쩌나/하나도 못 쓴 답안을 낼라니/귀가 막히네 울고 싶으이./그래도 좋아 끝났으니/오늘 저녁은 또 극장이다/그러나 시골 갈 일이 큰 일.”(<학교의 탄생> 중에서) 1929년, 김형두 학생의 시다. 시험 없는 세상 좀 어디 없을까. 예나 지금이나 시험지 앞에 선 학생의 마음은 한 없이 졸아든다. 그런데, 옛 청소년들도 국·영·수에 시달렸을까? 어느 시대에나 교육은 사회의 요구를 담고, 시험은 학습 상황을 평가한다. 그래서 공부는 개인에게는 고통의 추억을 안겨주지만, 시대의 철학을 드러내는 리트머스 용지가 된다. 고대 그리스의 입법가 솔론(Solon)이 제정한 학교 법규를 보면, 아테네의 주요교과는 음악과 체육이었다. 음악은 정서를 다독여 주고, 체육은 국가 방어를 위한 건강 증진의 수단이었다. 그리스 자유민들은 노예에게 생계 노동을 맡기고, 자신들은 교양 쌓기와 폴리스의 정치 운영에 관심을 쏟았다. ‘그리스판 사교육’인 변론술 열풍이 소피스트들에 의해 활성화된 것도 궤를 같이한다. 로마는 어땠을까? 광활한 영토를 장악하고 공화정과 제정을 겪었던 나라답게 공동체 정신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초등학교에서는 읽기, 쓰기, 산수를 기초 과목으로 가르쳤고, 중등학교부터는 법률학, 철학, 수사학, 의학 등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공동체의 규율과 의사소통 능력이 당시 사회의 기틀을 잡는 중요한 요건임을 알 수 있다. 교수법과 평가도 흥미롭다. 따라 읽기와 따라 쓰기는 독서교육의 핵심 교수법이었다. “아이들아, 매를 맞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해라”라는 교사의 글씨 밑에 학생들이 4번씩 따라 쓴 로마 시대 기록물이 전해온다. 공부를 게을리 한 학생들에게 채찍을 치는 일도 수메르나 로마 모두 자연스러웠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책상위에 다발로 묶은 매가 비치되기도 했다. 하긴, 서당의 아이가 회초리로 종아리 맞는 모습을 상기했을 때 우리에게도 낯선 일은 아니다. 상급학교로 진학한다는 개념이 없던 시대, 매는 교육평가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국가가 주관하여 국민 전체에 행하는 교육은 19세기 민족국가 건설과 함께한다. 18세기 말, 러시아의 프레드릭 대제는 역사상 최초로 공권력의 주도하에 전민취학의 의무교육을 실시했다. 기초교육을 받은 프러시아 군사들은 이후 나폴레옹 전쟁에서 그 우수성을 입증했다. 돈이 많이 들어 의무교육에 주저했던 다른 나라들도 읽고, 쓰고, 셈하기를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조직했다. 교육은 국가의 명령과 의무를 수행할 사람, 세금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 작업 관리자의 지시에 따라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 등 시대가 요청하는 인간 양성으로 화답한 것이다.
한편, 교육은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고 평가하려는 사회 제도와 맞물린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분이나 가문에 의한 관리 임용은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중국과 우리 나라는 ‘능력에 따라’ 인재를 선발할 수 있는 ‘과거제도’ 덕분에 일찍부터 합리적 선발 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했던 영국에서도 시험을 거쳐 관리를 임용한 것은 1870년 이후고 미국은 더 늦은 1883년의 일이다.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과거제도에서 철학자 왕이 다스리는 이상국가의 모습을 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양에서는 뒤늦게 그 가치를 깨달은 과거제도가, 비슷한 시기 동양에서는 ‘서구식 근대 교육’의 지향 아래 전격 폐지되었다. 수백년 동안 유교 경전을 외우고 입신양명을 꿈꾸던 조선조 선비들은 하루 아침에 날벼락을 맞았다. 12년 동안 수능 중심으로 공부해 온 학생들에게 수능 시험을 전격 폐지했을 때의 충격과 비교해 보라. 1894년, 고종은 “옛 사람들의 찌꺼기를 줍는” 구학문을 버리고 신학문을 가르쳐서 ‘문명 개화’와 ‘부국강병’을 이루자고 하였다. 근대의 학교는 새로운 나라 건설의 근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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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정/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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