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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지식인들의 사회참여는 사회공동체의 발전방향을 전망하고 구체적 좌표를 제시하는 적극적 실천행위다. 지난 2월6일 원로 지식인들이 서울 언론회관에서 ‘2005 희망제안’ 선언문을 발표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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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소재,주장,태도 등 잘 살펴야 [지문] 유교 사상이 지배하던 조선 시대를 살았던 선비들의 생활 세계에는 두 가지 방향으로 뻗어 있는 길이 있었다. 벼슬로 나가는 길과 산으로 나가는 길의 두 방향이 그것이다. ‘벼슬로 나가는 길’은 곧 서울로 나아가는 길이요, 세상에 나가 출세하고, 성공하는 화려한 길이며, 동시에 시끄럽고 티끌 자욱한 세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에 비해 ‘산으로 나가는 길’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숲이 우거진 산골의 초야에 묻혀 사는 한가로운 길이며, 동시에 맑은 생각을 가다듬고 밝은 지혜를 기르는 학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벼슬로 나가는 길에는 부귀 공명이 따르고, 가슴에 품었던 회포를 풀어 세상을 구원해 볼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 벼슬길에 나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충절과 큰 포부로 흘러 넘치는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를 읽으며, 자신의 뜻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그러나 벼슬로 뻗어간 길에는 온갖 오욕(汚辱)과 모함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기도 하다. 때로는 자신의 마음을 잃기도 하고 심지어 목숨을 빼앗기기도 한다. 이에 비해 산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단조롭기는 하지만 평화로운 안식과 정겨운 기쁨이 있다. 자신의 심신을 살찌게 하고 생각을 깊고 맑게 가다듬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산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따라 읊었을 것이다. 도연명은 ‘귀거래사’에서 자신이 벼슬에 나갔던 길을 ‘마음이 육신의 노예가 되었다.(以心爲形役)’고 규정하였으니, 그렇다면 산으로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육신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시대 선비들을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누면, 나가는 데 힘쓰는 인물과 물러나는 데 힘쓰는 인물이 있었다. 조광조와 이이는 전자에 속하고, 이황과 조식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황은 항상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기에 ‘산새’에 견주어지기도 하였고, 조식은 아예 벼슬길에 나갈 생각을 버리고 산야(山野)에 파묻혔던 고고한 처사(處士)의 모범이었다. 그런데 조선 시대 선비들의 풍조는 물러나는 것을 더욱 고상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벼슬을 버리고 산야로 물러나는 것은 욕심을 버리는 것인데, 범상한 인간이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산으로 돌아오면 학문을 연마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맹자는 “출세를 못하면 자신의 덕(德)을 선(善)하게 닦고, 현달(顯達)하면 천하를 아울러 선하게 한다.”라고 하여, 높은 벼슬에 올랐을 때와 초야에서 곤궁하게 살 때에 선비가 해야 할 각각의 도리를 제시해 주고 있다. 온 천하를 선하게 하기는 어려워도 자신의 인격을 선하게 하기는 좀 더 쉬운 것이라 생각할 터이고, 동시에 자신의 덕을 선하게 하는 ‘수양(修養)’은 온 천하를 선하게 하는 ‘경세(經世)’의 뿌리가 되느니 만큼 먼저 수양하는 것을 마땅한 일로 강조하게 된다. 그만큼 벼슬에 나가고 출세하기를 서두르기보다는 초야에 묻혀 내면의 실력, 곧 학문을 닦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산 속의 그윽한 골짜기에 자리잡고 고요한 가운데 독서하고 사색함으로써 정밀하고 순수한 학문을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 따라 산야에 묻혀 있던 선비들은 인간과 우주의 근원을 궁리하는 철학이나 인격과 도덕성을 연마하는 수양론에 관심의 초점을 두었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 사회에서 산은 학문의 산실이었으며 사상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2001년 8월 3학년 학력평가> [문제] 위 글에 근거하여 [보기]를 감상하였다. 적절하지 않은 의견은? [보기] 옹헤야 소리 내며 발 맞추어 두드리니 삽시간에 보리 낟알 온 마당에 가득하네. 주고받는 노랫가락 점점 높아지는데 보이느니 지붕 위에 보리티끌뿐이로다. 그 기색 살펴보니 즐겁기 짝이 없어 마음이 몸의 노예 되지 않았네. 낙원이 먼 곳에 있는 게 아닌데 무엇하러 벼슬길에 헤매고 있으리요. -정약용, ‘보리타작’ 중에서 ① 철호: [보기]의 화자는 ‘벼슬로 나가는 길’에 회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② 영은: 맞아. [보기]의 화자가 ‘무엇하러 벼슬길에 헤매고 있으리요.’라고 말한 데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어. ③ 선주: [보기]의 화자는 농민들이 즐겁게 노동하는 모습에서 ‘정겨운 기쁨’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들이 ‘마음이 몸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거야. ④ 광수: 또한 [보기]의 화자는 ‘마음이 몸의 노예가 되지 않은’ 농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있기도 하지. ⑤ 동준: 그렇다면 [보기]의 화자는 ‘물러나는 데 힘쓰는 인물’ 유형 중에서도 ‘경세’와는 아예 담을 쌓으려 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네. [유형노트] 감상의 적절성 파악 한 편의 글, 한 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였는가를 평가하는 문항이다. 주어진 지문에 관해 묻기도 하고 위 문제처럼 지문을 바탕으로 ‘보기’에 대해 판단하는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 때는 지문과 ‘보기’가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따져 보는 게 우선이다. 소재가 같은지, 태도가 같은지, 주장이 같은지 등의 공통점을 찾으면 문제를 풀기가 훨씬 쉬워지기 때문이다. 공통점을 찾았으면 차이점 역시 찾아야 한다. 주로 이 부분에서 답이 나오는 수가 많다. 또 답지의 내용이 지문과 ‘보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지, 전체 주장과 어긋나는 부분은 없는지 살피는 것도 필요하다. [풀이] 정답: ⑤. 지문에 의하면 ‘물러나는 데 힘쓰는 인물’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거나 벼슬길에 나갔더라도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수양하기를 항상 꿈꾸는 선비를 의미한다. ‘무엇하러 벼슬길에 헤매고 있으리요.’에서 보듯이 [보기]의 화자는 ‘물러나는 데 힘쓰는 인물’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영은’의 말은 옳다고 할 수 있지만 ‘동준’의 말처럼 ‘경세’와 담을 쌓으려 한 인물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근거가 없다. ‘경세’는 ‘세상 사람들을 경계하여 깨우침’의 뜻이다. 이만기/언어영역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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