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7.10 14:22 수정 : 2005.07.13 02:16

<철학자들의 모임>. 폼페이 서쪽 토레 안논치타에서 발굴, 모자이크, 기원전 2세기 말~1세기 초. 사진 출처: <소크라테스의 변명, 진리를 위해 죽다>(안광복 지음, 사계절 펴냄)


플라톤의 <향연>

<향연>은 아마 플라톤 대화편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일 것이다. 원제는 <심포지온(Symposion)>인데, ‘함께 마시다’라는 뜻이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함께 술을 마시며 대화와 토론을 나누는 자리를 일컬었다. 우리말로는 ‘향연’ 또는 ‘잔치’라고 옮기는데, 대화와 토론의 의미를 살리려면 원어 그대로 ‘심포지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이 말은 이미 국제 공용어가 된 ‘심포지엄’으로 진화했다).

<심포지온>의 부제는 ‘사랑(에로스)에 관하여’다. 부제는 플라톤 전집을 정리하면서 관습적으로 붙여 온 것인데, 때로는 부제가 작품의 핵심을 가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 대화편의 등장인물들은 에로스의 다양한 차원에 대해 토론한다. 남녀의 사랑도 논하고 동성애도 논하며 나라 사랑도 논한다. 더 나아가 에로스의 우주적 차원에 대해 논하기도 한다.

이렇게 사랑의 여러 형태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는 까닭에, 사람들은 <향연>에서 이른바 ‘플라토닉 러브’라는 것을 유추해 내기도 했다. 이 말은 흔히 남녀간의 육체적인 사랑에 대하여 정신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것으로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이 고정관념을 비켜 가야만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진정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포착할 수 있다.

플라톤이 <향연>을 쓴 목적은 사람들 사이의 사랑에서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을 강조하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사랑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가 에로스의 여러 차원을 논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상식적으로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는 어떤 특별한 사랑 행위가 갖는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것은 ‘지혜를 사랑하는’ 행위다. 즉 소피아를 사랑한다는 뜻의 ‘필로소피아’다.

플라톤은 오늘날 우리가 ‘철학’이라고 번역하는 필로소피아가 본질적으로 무엇인지,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우회의 작전을 쓰고 있다. 에로스의 여러 차원들을 거쳐 필로소피아의 개념에 에둘러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향연>의 진정한 주제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또한 소크라테스라는 탁월한 인물로 상징되는 ‘철학자란 어떤 사람인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후대의 사람들이 도출해낸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을 굳이 플라톤 사상에 역으로 적용하면 이렇다. 그것은 남녀간의 정신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지를 끊임없이 사랑하고 탐구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자는 에로스와 동일시된다(플라토닉 러브는 세계 인식 차원에서의 사랑을 개인적 관계의 차원으로 치환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서구 문명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필로소피아의 전통, 즉 이 세상 전체에 대한 진리 또는 과학적 원리를 파악하고 증명하기 위해 지를 끊임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상식적 태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게 상식이라는 말이다. 이는 필로소피아가 간혹 ‘애지의 광기’에 이르러 사람에 대한 사랑조차 망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플라톤은 인간 삶에서 필로소피아의 가치를 강조했지만, 현재의 문명을 비판적 자세로 살아야 하는 오늘의 청소년들은, ‘철학하기’는 철학 자체에 대한 의심을 포함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향연>을 꼼꼼히 읽어 볼 필요가 있다.

김용석/ 영산대 교수 anemoskim@yahoo.co.kr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