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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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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복 교사의 시사쟁점! 이 한권의 책 / 난이도 수준 고2~고3
44. 국가부도 - ‘보편적 복지’는 국가부도를 이끈다?
<국가부도>발터 비트만 지음류동수 옮김/비전코리아 로마제국의 농민들은 ‘경쟁력’을 잃었다. 대형 농장인 라티푼디움(Latifundium)이 곳곳에 들어선 탓이다. 라티푼디움은 너른 땅에 노예를 풀어 농사를 지었다. 자잘한 농장들보다 생산량이 훨씬 많았고 가격도 낮출 수 있었다. 일손을 놓은 농민들은 로마로 몰려들었다. 물론 수도 로마에도 일자리가 있을 리 없었다. ‘빵과 서커스’라는 로마식 사회복지제도는 그래서 생겨났다. 놀고 있는 시민들에게 밀을 무료로 나눠준 것이다. 넉넉한 시간을 때워주기 위해 검투사 시합도 열었다. 물론 나랏돈은 숱하게 들어갔다. 그래도 로마는 걱정 없었다. 전쟁을 통해 엄청난 재물을 끌어모았기 때문이다. 식민지와 전쟁터에서 거둔 부는 든든한 자금줄이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주변에 싸울 만한 부자 나라가 거의 사라져 버린 탓이다. 이제 전쟁에서 이겨도 빼앗을 재산은 별로 없었다. 수입이 점점 줄어도 나갈 돈은 어쩌지 못했다. 빵과 서커스는 어느덧 ‘당연하게’ 시민들이 누리는 몫이 되었다. 이를 없앴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살림살이가 무너진 상황, 로마는 서서히 무너져갔다. 우리에게 로마의 처지는 ‘옛이야기’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의 모습도 별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화될수록 소시민들은 대기업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튼튼한 일자리는 사라지는 중이다. 실업수당을 비롯해 국가의 복지에 기대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간다.
그래도 국가는 별걱정 없다. 대기업들은 해외시장을 누빈다. 이들이 내는 세금은 엄청난 규모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오래가지 못할 테다. 시장의 경쟁은 무척 치열하다. 이익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새로운 시장을 찾기도 점점 어려워진다. 경제가 가라앉으면 세금도 잘 걷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국가가 써야 할 돈은 그대로다. 시민들은 복지제도를 ‘당연한 듯’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없앴다간 선거에서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모른다. 국가는 표를 가진 시민들이 무섭다. 그래서 세금을 더 내라고 하지 못한다. 결국 부족한 돈은 빚으로 메워질 테다. 이렇게 국가는 서서히 병들어 간다. 경제학자 발터 비트만이 ‘공공 재정의 역사는 곧 국가부도의 역사’라고 비아냥대는 이유다. 물론 그는 나라의 빚을 나쁘게만 보지 않는다. 불경기에는 국가가 돈을 풀어야 한다. 누구도 쓸 돈이 없는 상황, 정부라도 돈을 써야 경제가 굴러가지 않겠는가. 이때 지는 빚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경제가 좋을 때 정부의 살림살이는 흑자여야 한다. 다시 경기가 나빠질 때 쓸 돈을 마련해두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흑자를 거두는 정부는 거의 없다. 경제가 잘 굴러가도 지출을 줄이기 어려운 탓이다. 발터 비트만은 개혁이 어려운 이유를 쉽게 풀어준다.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 국가가 나서서 허리띠 졸라매기는 어렵다. 가뜩이나 불안한 시민들이 더 움츠리지 않겠는가. 살림이 피어나면? 개혁은 더 어렵다. 시민들은 이렇게 투덜댈 테다. 지금도 잘 굴러가는데 뭐하러 뜯어고친단 말인가. 결국 개혁은 나라가 결딴나고 나서야 이루어진다. 남미의 여러 나라들은 이런 식으로 ‘상습적인 부도국가’가 되었다. 문제는 선진국들도 비슷해진다는 점이다. 일본 전체가 지고 있는 빚은 국내총생산(GDP)의 600%에 이른단다. 이자가 1%만 올라도, 이를 물기 위해 세금에서 6%를 더 써야 하는 판이다. 나라 살림이 제대로 굴러갈 리 없다. 비트만에 따르면 미국, 독일 등 다른 선진국들의 사정도 별다르지 않다. 국가 부도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비트만의 해답은 분명하다. “분배는 벌어놓은 만큼만 이루어진다.” 사회복지는 ‘시장에 걸맞은 수준’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보완성의 원리’를 강조한다. 국가는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일에만 도움을 주어야 한다. 정말 먹고살 길이 없는가? 국가는 이때 나서야 한다. 반면 개인이 알아서 할 수 있는데도 도움을 준다면? 나라가 감당해야 할 일은 무한정 늘어나게 된다. 세금으로 돌아갈 혜택의 범위도 꼼꼼히 챙겨야 한다. 나라 전체에 이익이 돌아가는 일인지 일부 지역, 몇몇 사람들만 이롭게 되는지를 따지라는 뜻이다. 국방이나 외교는 시민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반면 어느 지방에 고속도로를 짓는 일은 어떤가? 지역을 넘어 국익이 되는 일일까? 혜택이 일부에 그칠 때는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대가를 치르는 것이 원칙이어야 한다. 복지로 늘어날 부담을 혜택을 보는 이들이 짊어지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비트만은 건강보험을 예로 든다. 진료를 많이 받을수록 보험료가 늘어나면 어떨까? 당연히 사람들은 의료비를 줄이려 노력하게 된다. 국가가 무한정 부족한 치료비를 메워준다면? 사람들은 꼭 필요 없는 치료라도 마다하려 하지 않을 테다. 실업급여나 여타의 복지비용도 다르지 않을 테다. 이 잣대로 ‘무상급식’ 문제를 가늠해보자. 급식 문제를 둘러싼 서울시와 교육청의 힘겨루기는 올해의 ‘핫이슈’다. 무상급식은 꼭 정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일까? 정말 어려운 아이들을 먹이는 일에 뭐라 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시민 대부분은 급식비 낼 정도의 여유가 있다. 물론 ‘보편적 복지’는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복지를 ‘시장에 걸맞은 수준’으로 붙잡아 두는 일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많은 아이들이 혜택을 보는 만큼 이에 대한 부담을 기꺼이 짊어지려는 자세도 중요하다. 서울시민에게 필요한 것은 ‘무상급식을 실시할지’를 묻는 투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시민들에게는 ‘무상급식에 필요한 만큼 세금을 더 내겠는지’를 물었어야 했다. 보편적 복지의 진짜 문제는 ‘원칙’이 아닌 ‘곳간’에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 시사브리핑: 서울시의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지난 8월24일, 서울시가 실시한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무산됐다. 최종 투표율 25.7%로, 투표함을 열 수 있는 투표율인 33.3%에 미달된 탓이다. 무상급식을 주장하는 시민단체와 야당은 무상급식 주민투표 자체를 줄기차게 반대했다. 반면 서울시와 보수단체는 주민투표를 ‘포퓰리즘의 심판’으로 간주하여 참여를 독려했다. 선거 결과는 이후 정책 운영에 적지 않은 파장을 던질 전망이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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