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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31 14:46 수정 : 2005.07.31 15:21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고찰을 넘어 ‘인간은 온전한 여럿이다’라는 철학적 주제로 우리를 이끈다.  그림 출처: <지킬 박사와 하이드>(문예출판사 펴냄)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는, 어렸을 적 동화책으로 읽었거나 한여름 밤 ‘무서운 이야기 해주세요!’ 하면서 어른을 졸라 들었던 등골 오싹해지는 공포 이야기일 것이다. 작품의 내용 자체가 철학적 주제를 명시적으로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망 높은 의사 지킬 박사가 자신이 발명한 특수 약을 마시고 포악한 하이드씨로 변한다는 흥미진진한 줄거리가 오히려 진지한 철학적 탐색을 가려 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 작품에서 평론가들이 공통적으로 파악하는 주제는 인간의 이중성 및 선과 악의 대립이다. 혹자는 이 작품을, 이중 인격을 다룬 도덕주의로 가득 찬 환상소설이자, 인간성에 내재한 선과 악의 문제를 드러낸 현대적인 우화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제 우리는 1886년 출간된 이 작품을 굳이 환상소설의 범주에 묶어 둘 필요 없이, 일반 문학의 고전으로서 ‘철학하기’의 대상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더욱 풍부하고 새로운 철학적 화두들을 추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지킬이 하이드로 변하는 것을 이중 인격이라는 통념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인간의 ‘자기 복제’의 한 방식으로 볼 수도 있다. 지킬은 (세포 분열에 빗대어 표현하면) ‘심성 분열’을 시도한 것이다. 지킬은 분리된 심성에 육체의 외형을 갖게 해서 하이드라는 또 하나의 자기를 복제해낸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자신 전체를 그대로 복제한 것이 아니라, ‘자아의 일부’를 새로운 외형을 갖추어서 복제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 복제의 다양한 개념을 시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라는 제목에 의식이 점령당해 이 작품을 이중 인격 또는 선과 악의 주제로 파악하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탈피할 가능성 또한 가질 수 있다. 스티븐슨의 작품을 이분법적으로만 파악한다면, 그것을 생각의 화두로 삼아 얻을 수 있는 지적 유산은 엄청 축소될 것이다. 이 작품이 던지는 진정한 메시지는, 지킬이 의도한 “인간은 온전한 하나가 아니라, 온전한 둘이다”라는 명제에 머무는 게 아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철학적 주제는 ‘인간은 온전한 여럿이다’라는 것이며, 그럴 때 우리는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 수 있다.

자아는 단수도 아니고, 이분적인 둘도 아니며, 복합적인 여럿이다. 작가 스티븐슨은 이 점을 뚜렷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주로 이원적 입장을 주인공 지킬의 입을 통해 말한다. 하지만 지킬이 어터슨 변호사에 남긴 유언 일부에는 복합적 입장이 담겨 있다. “나는 이원적이라는 말을 했다. 현재 나 자신의 지식 수준으로는 그 이상의 규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문제에서 혹자는 내 입장을 따를 것이며, 또 다른 사람들은 나를 능가할 것이다. 그래서 감히 추측컨대, 인간은 잡다하고 서로 모순되는 개별적 거주자들의 집합체라는 것이 결국 드러나지 않을까 한다.” 오랫동안 철학자들이 많이 써왔던 황금 질문, “너 자신을 알라”의 의미도 ‘복수의 자아’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양한 생각의 갈래를 갖고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이 밖에도 이 작품에서 우리는 선과 악의 구분이 아니라, 선과 악이 만나서 접점(인터페이스)을 이루고 서로 다양하게 변형시키는 ‘선악의 상호작용’이라는 주제를 끌어낼 수도 있다. 지킬과 하이드의 공포 이야기는, 그 배경이 된 안개 자욱한 런던의 새벽 거리처럼 앞으로 풀어야 할 철학적 수수께끼 자욱한 미로로 우리를 흥미진진하게 몰고 간다.   


영산대 교수 anemoski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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