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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07 17:24 수정 : 2005.08.07 17:26

영화 <드라큘라>(토드 버닝햄 감독, 1931년)의 한 장면. 사진 출처: <드라큘라>(옥스퍼드대 출판부 펴냄)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브램 스토커 ‘드라큘라’

흡혈귀의 이야기는 여러 문명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 동화, 만화 등에 등장하는 ‘드라큘라 백작’의 이야기는 대부분 브램 스토커의 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더블린 출신의 작가 스토커는 1897년 <드라큘라>를 쓴 이후 오랫동안 자기 작품의 주인공에 그 이름이 가려져 있었다.

각종 매체가 <드라큘라>의 내용을 이용했지만, 그에 대한 학술적 접근은 197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드라큘라를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성적인 갈망의 환영으로 보기도 했고, 역사학적으로 제국주의의 상징이나 자본주의 독점 현상의 은유로 보기도 했다. 90년대에는 인터넷 확산이라는 문화 현상을 흡혈귀 ‘뱀파이어’가 퍼져 나가는 것에 빗대어 ‘인터뱀프’(Intervamp)라는 말도 나왔다.

이런 다양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스토커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 주제가 있다. 그것은 거의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는데, 바로 생명의 주제다. 이는 피와 생명의 관계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드라큘라 백작은 타인의 피로 생명을 연장할 뿐 아니라, 젊음을 되찾을 수도 있다. 백작과 맞서는 사람들은 자신의 피를 지킴으로써 생명과 영혼을 지킬 수 있다.

피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생명 탈취와 보호의 줄다리기는 작품 전반부를 압도하는 루시 웨스텐라의 에피소드에서 긴박하게 전개된다. 곧 명문가에 시집갈 아름다운 루시는 백작에게 피를 빨린 뒤, 시름시름 생명력을 잃어 간다. 그의 치료를 맡은 반 헬싱 박사는 당시로는 첨단 의술인 수혈로 루시의 생명을 이어 간다. 하지만 백작은 박쥐로 변해 밤마다 그녀를 흡혈하고, 박사는 자신의 피까지 제공하면서 수혈로 대응한다.

이 투쟁의 과정은 처절하고 끔찍하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 앞에 붙는 ‘곱상한’ 수식어들(아름다운, 소중한 같은)로는 생명을 잘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암시를 받는다. 생명에 관한 것은 또한 무섭고 잔인하며 두렵고 치열하다. 이는 생명이 ‘시대의 화두’인 오늘날 더욱 필요한 복합적 인식일 것이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 역시 이런 복합성을 바탕으로 할 때 그 윤리적 근거를 폭넓게 가질 것이다.

<드라큘라> 독서는 생명을 본질적으로 재인식할 기회를 줄 뿐만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인간이 추구해 온 어떤 경향의 또 다른 측면을 성찰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영원성과 영생의 주제다. 인류 역사의 경험으로 보아 인간은 유한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영원한 그 무엇을 추구해 왔다. 인식론적 차원에서는 영육이원설과 영혼불멸설을 ‘개발’하여 형이상학적으로 ‘영원한 진리’의 개념에 연결하였고, 종교적으로는 윤회 또는 부활로써 영원성을 실현하리라는 믿음을 주었으며, 과학적으로는 생명 연장과 생체 복제의 유전공학으로 영생 개념의 숨은 측면에서 묘한 희망(?)의 불씨를 피운다.

흡혈귀 드라큘라는 또한 불사귀()다. 그것은 환상적 차원에서 영원성과 영생의 주제를 대변하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불사 영생의 방식은 괴기하고 무엇보다 비상식적이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종교적, 과학적 차원에서 인류가 수 천 년 동안 추구해 온 영원과 영생의 방식은 얼마나 상식적인가? 그것은 괴기하지 않은가? 인류의 위대한 성취에 괴기소설의 주제를 비유하는 것을 도발적이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철학적 성찰의 도발성은 젊은이들의 힘이다. 그 힘으로 사유의 지평은 넓어진다.  

영산대 교수 anemoski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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