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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21 15:01 수정 : 2005.08.21 16:11

<투명인간>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는 결코 타자와 관계 맺을 수 없음을 은유적으로 보여 준다.출처: 영화 <투명인간>(감독 제임스 웨일, 19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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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웰스 ‘투명인간’

의학, 생화학, 물리학 등을 섭렵한 과학자 그리핀은 생명체의 몸을 보이지 않게 하는 약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작품의 원제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며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는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하여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된다. 아무도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신비와 힘과 자유를 의미한다”. 그는 이 세상을 얻은 듯했다.

 그리핀은 보이지 않는 몸으로 거리에 나섰을 때, 마치 눈먼 사람들만 사는 도시에서 눈뜬 사람은 자기 혼자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마음껏 관찰할 수 있다는 데서 쾌감을 느꼈다. 그리핀은 자신이 얻게 된 힘과 우월함을 시험해 보고 싶은 “겉잡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이점을 이용해 사람들을 골려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핀은 ‘나는 타인을 볼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나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미처 가늠하지 못했다. 그는 ‘투명인간’의 불리한 점을 곧바로 경험한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거리에 가만히 서 있을 때도 사람들이 자기에게 와서 부딪친다. 보이지 않는 이점을 위해서는 추워도 몸에 아무것도 걸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일상적 불편은 둘째 문제다.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생활이 계속될수록 그리핀의 마음과 영혼은 점점 썩어들어 간다. 이는 그 자신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것이다.

왜 그럴까? 그는 다른 어떤 사람과도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일체의 타자성이 배제된 것이다. 타자성은 상호 노출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나는 타인을 온전히 볼 수 있는데 타인은 나를 전혀 볼 수 없고, 나는 타인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데 타인은 나를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는 내가 아무리 타인을 원하더라도 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 관계 없는 타자성은 없다.

 ‘투명인간’은 남이 가질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초인의 신화’와 유사한 점이 있으면서도, 많이 다르다. 사람들은 슈퍼맨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고 친구가 될 수 있다. 이는 원더우먼이나 스파이더맨에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그와 아무도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소설에서도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듯이 그는 남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일상생활의 불편함은 자신을 위한 타자가 없기 때문에 더욱 가중된다. 남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얼굴에 붕대를 감고 색안경을 끼는 등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기괴함에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타자’로서는 거부당한다. 그는 가장 불쌍한 초인인 것이다.

허버트 조지 웰스가 1897년 발간한 <투명인간>을 기발한 아이디어의 환상소설이나 과학에 대한 경고를 담은 과학소설로만 읽어서는, 그 우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투명인간>은 ‘자기 노출과 타자성의 함수 관계’에 대한 기막힌 은유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얻을 수 없다. 몸과 마음 모두에서 자신을 열어야만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전혀 자신을 내보일 수 없었던 그리핀은 타자의 정을 조금도 얻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 스스로 타자가 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인간’은 타자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타자 없는 자아는 없다. 이것이 그리핀이 맞은 비극의 본질이었다.  


영산대 교수 anemoski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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