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28 16:11
수정 : 2005.08.28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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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구의 괴물로 알려진 ‘프랑켄슈타인’은 실은 괴물을 만든 과학자의 이름이다. 이름도 없이 세상에 나온 괴물은 타인으로부터 ‘부정된 존재’가 된다. 사진 출처: 영화 <프랑켄슈타인>(감독 제임스 웨일, 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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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사람들은 프랑켄슈타인을 잘 알고 있다. 그 모습을 묘사하라고 한다면, 엄청나게 큰 거구, 여기저기 꿰맨 자국들, 일그러진 눈 등으로 그릴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은 한마디로 ‘괴물’을 연상하게 한다. 그런데 사실 메리 셸리가 1818년 출판한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에서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다. 괴물에는 이름이 없다. 소설 속에서는 그냥 ‘괴물(monster)’이라고 불리거나 다른 추악한 말들로 불린다.
‘이름 없는 존재’, 여기서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청년 과학도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시체의 각 부위를 접합해서 몸을 만든 다음 에너지 발생장치로 충격을 가해 인간을 ‘닮은’ 생명체를 창조한다. 그러나 이 순진한 창조자는 자신의 피조물이 워낙 추하고 무서워서 실험실에서 도망친다. 그러면서 빅토르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만다. 피조물에 이름을 붙이지 못한 것이다.
이름도 없이 홀로 남은 괴물은 이 세상에 첫발을 내딛으면서 이미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정된 존재’가 된다. 아무도 그를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은 존재 자체가 부정될 가능성을 의미한다. 창조 신화에서도 조물주는 자신의 피조물에 이름을 지어 주어 그 존재를 확인한다. 아담도 그렇게 탄생했고 그 역시 에덴 동산에 있는 다른 생명체들의 이름을 짓는 것으로 삶을 시작한다.
작명은 아무렇게나 부르지 않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일이다. 내게 이름이 있다는 건 나 외의 다른 사람들을 제약한다. 그것은 ‘나를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알리는 일이며, 곧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탄생 뒤 이름이 없다는 건 비극의 시작이다. 왜 그런가? 비극의 본질은 결국 운명이 나를 함부로 대하고 말았구나 하고 인식하는 데 있다. 이름이 없다는 건 이미 이 세상이 나를 함부로 대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일이다. 빅토르의 피조물은 모든 것이 자신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삶을 시작한 것이다.
빅토르는 자기가 실험실을 도망쳐 나왔다는 우연의 사건이 이런 비극을 초래하리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비극의 특성은 바로 우연처럼 보이는 모든 사건에 사실 필연성이 철저하게 내재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메리의 소설은 한번 더 비극적이다. 괴물은 자신의 조물주 빅토르를 찾아가 처절하게 외친다. “나는 당신에게 아담과 같은 존재여야 하는데 당신은 나를 타락 천사 취급하는군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나를 기쁨으로부터 몰아내다니.” 하지만 괴물 역시 자기 비극의 원인을 잘 모른다. 그는 아담 같은 존재여야 하지만 아담처럼 이름을 선사받지 못한 이상 아담같이 될 수 없다. 원인도 모르는 사건에 말려들어 고통받는 것만큼 비극적인 일도 없다.
이 밖에도 메리의 작품은 비극의 요소들을 곳곳에 배치해 놓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비극의 주제는 운명과 연관해서 존재론적이거나, 인간관계의 뒤틀림과 연관해서 사회철학적이었다. 인간이 창조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들, 즉 문화적 행위와 연관된 비극성은 다뤄지지 않았다. 문학사가들은 과학소설(SF)의 모든 특질을 갖춘 최초의 소설이 막 소녀 티를 벗은 한 여성의 손에 의해 쓰여졌다는 데 별 이견이 없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견해를 더하고 싶다. 메리의 작품은 비극이 문화철학적 주제라는 것을 다각적으로 보여 준 최초의 소설일 것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ki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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