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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05 22:33 수정 : 2005.09.06 09:50

‘지금-여기’ 에서 세계로 관계 확장

이 시험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무난했다’였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해설이 여러 갈래로 나뉠 수밖에 없다. 그건 괜찮다. 어차피 논술이란 게 주어진 논제와 제시문에 따라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므로. 그러나 우리 고등학생에게 이렇게 까다로운 문제를 내어도 되는지는 의문이다. 하나 어쩌랴. 대학 들어가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쓸 수밖에.

해결책은 딱 하나, 주어진 제시문을 논제에 맞게 읽어내고, 이를 근거로 삼아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것뿐이다. 배경지식 같은 건 아예 생각도 말아야 한다. 결국 제시문을 관통하는 원리를 찾는 수밖에 없다.

논제 분석

논제는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다. 이렇게 짤막한 논제가 나왔을 때는 일단 뜯어보는 게 중요하다.

1. 왜 사물에 대한 인식이 문제가 될까? 이건 사물의 존재방식과 관련된 문제다.


2. 인식하는 주체는 누구이고, 그가 어떤 조건에 있기에 인식이 문제가 될까?

3. 무엇이 그릇된 인식인가? 어떻게 올바른 인식에 이를 수 있을까?

1. 사물에 대한 인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사물이 바뀌기 때문이다. ‘이것은 꽃이다’라는 말은 당장은 맞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니다. 왜 바뀔까? 사물이 다른 사물과 맺는 관계가 바뀌기 때문이다. 사물은 무한대의 관계 속에 놓여 있다. 따라서 사물의 존재방식은 한마디로 ‘무한관계→무한변화’다. 이것이 첫째가는 포인트다.

2. ‘무한관계→무한변화’는 인식하는 주체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의 마음 상태, 그의 위치, 경험, 목적에 따라 똑같은 사물도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게다가 똑같은 것을 경험해도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의 인식이 진리인가? 여기서 ‘나’의 인식이냐, ‘우리’의 인식이냐도 문제가 된다.

3. 이제 그릇된 인식이 뭔지 알 수 있다. 사물의 관계와 변화를 무시한 것, 관찰자가 놓인 상황이나 목적을 무시한 것, 독단적인 인식 따위다. 이런 잘못된 인식을 제시문에서 찾아내고, 각 제시문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살피면 ‘도달하는 방법’도 발견할 듯하다.

나머지 요구 사항이 독특하긴 해도, 위의 것을 떠올리면 그리 어렵진 않다. 우선은 [제시문1]을 보는 자기 견해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에 따라 [제시문2]를 보는 태도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 개 참고문을 활용하라는 건, 자기 견해가 분명하다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제시문 분석

[제시문1] 연암이 우리에게 주는 것

다양한 인식들이 나오는 이유: 첫 번째 인식 대상은 강물 소리다. 그런데 그 소리가 무섭게 들린다. 까닭은? 누구는 이곳이 전쟁터였기 때문이라지만, 연암이 보기에, 그것은 듣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달린 것이다.

두 번째는 왜 사람들이 강을 건널 때 하늘을 우러러보는지에 대한 인식이다. 강을 건너기 전에는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아홉 차례나 강을 건넌 뒤에는 물이 무서워 ‘피하기 위함’인 걸 깨닫는다. 이것은 경험의 유무에 따라 인식이 달라진 경우다. 여기서 좀더 나가보자. 연암의 최종 해석은 서로 다른 두 경험을 반성하면서 이뤄진 것이다. 이처럼 각각의 경험들은 세계를 더 크게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세 번째는 낮에 건널 때와 밤에 건널 때의 강이 다르게 인식된다는 거다. 이처럼 똑같은 대상이라도 그 대상이 무엇과 관계 맺느냐에 따라 달리 다가온다.

그릇된 인식들: 정리하면 이렇다. 내가 이런저런 상태나 조건에서 사물을 보듯, 사물 역시 무수한 관계 속에서 나에게 다가온다. 그런데 제시문에서 사람들은 자기 조건에 매달려 “귀와 눈만을 믿”었기에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아져서 큰 병이” 되었다. 자기 마음 상태로만 사물을 대하거나, 자기 조건에서만 사태를 판단하는 것도 문제다. 한마디로, ‘~로만’이 문제다.

올바른 인식: 다시 ‘무한관계→무한변화’를 떠올리자. 연암이 ‘나는 도를 깨달았도다!’ 한 게 이거다. 그렇다면 깨달은 자의 태도는 뭘까? 연암은 이제 “마음을 잠잠하게” 한다. 이게 이번 문제에서 가장 크게 수험생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연암이 마치 관념론자나 되는 듯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연암의 깨달음이 이런저런 경험에서 나온 것임을 떠올리면, 전적인 오해다. 힌트는 ‘마음의 판단’, 즉 ‘생사의 판단’이란 말에 있다. 물에 빠지면 죽기밖에 더 할까 하는 판단이 서자, 전혀 새로운 태도를 취하게 되더란 말이다. 지금 연암은 어차피 강을 건너야 한다, 그런데 강은 무섭게 넘실거린다, 이런 상황과 목적에서라면 무엇이 올바른 인식일까?

그렇다. 우리의 인식이 ‘무한관계로 무한변화하는 사물’에 대한 인식이라면, 그 인식은 ‘원천적 모름 속의 앎’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여기의 앎’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지금-여기에서 되도록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뿐이다. 어떻게? ‘지금-여기의 상황과 목적에 맞는 인식’이 그것이다.

인식의 재검토: 그렇다면 연암이 얻은 새로운 관점은 옳은가? 그럴 리가! 연암은 “나의 산중으로 돌아가 앞내의 물 소리를 다시 들으면서 이것을 경험해 볼 것”이라 말한다. 자신의 새로운 관점을 삶에서 반성하겠다는 거다. 새로운 ‘지금-여기’에서 새로운 앎을 얻겠다는 거다. 이처럼 이치를 깨달은 자는 자신을 고정시키지 않고, 늘 나아간다. 그 결과 그가 인식하는 세계는 갈수록 풍성해지는 세계다.

[제시문2] 보편성의 확장, ‘우리’

논제는 ‘[제시문1]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 근거하여’ [제시문2]를 논하라 했다. 나는 [1]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2]는 이의 연장선상에서 검토하겠다.

우물 안 개구리들이 이해한 세계: 우물 안 개구리들에게 하늘은 ‘가끔씩’ 보인다. 보일 때도 있고,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이건 개구리들이 낮과 밤, 즉 시간 흐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개구리들은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수성’이 ‘보편성’은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다. 모두가 다 받아들인다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개구리들, 싸우다: 하늘이 늘 궁금했던 페페는 우물 밖으로 나간다. 거기서 그는 한낮의 해를 본다. 그에게 세상은 ‘너무도 밝아서 눈이 아플 정도’다. 필라도 나가 본다. 그런데 그는 밤에 도착한다. 당연히 “부드러우면서도 밝고 둥그런 것”을 본다. 페페와 필라는, 서로 자기가 옳다면서, 싸운다. 왜 싸울까? 누군가가 하늘을 잘못 봤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들은 분명히 세계를 객관적으로 경험했다. 그럼? 자기 경험, 자기 인식만을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세 개구리, 하루를 경험하다: 현명한 판관, 페트라의 제안으로 개구리들은 함께 세상으로 나간다. 그들은 석양과 달과 별, 아침 해를 차례대로 본다. 이렇게 함께 경험하면서, 페페와 필라가 본 것이 하루의 변화 중 각각 한 단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제시문1]을 더 넓힐 수 있는 핵심 두 가지를 볼 수 있다. 하나는 세계가 ‘무한시간’ 속의 세계라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그 무한한 세계 속에 ‘나’와 ‘너’, 곧 ‘우리’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 비로소 올바른 인식을 말할 수 있다.

인식의 확장: 이제 개구리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우물보다 더 넓고 복잡한 새로운 세계가 무한하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만약 개구리들이 목격한 것이 세계의 전부라 생각했다면, 그건 또 다른 우물에 갇힌 꼴이 된다. 대신 개구리들은 하나의 깨달음에서 만물의 이치를 얻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깨달음, 즉 무지로 나아감은 새로운 무지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공자가 말한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함이 곧 앎’이라 말한 것의 참뜻이다. 그것은 ‘무지를 앎’이고, 그 앎이 곧 나아감의 출발이라는 거다. 물론 그 무지의 영역이 무한대임을 이제는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총정리

[1]과 [2]는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우리의 인식은 무한관계, 무한변화, 즉 무한공간, 무한시간이라는 조건 속에 있다는 것, 따라서 ‘지금-여기’의 인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한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원천적 모름 속의 앎’일 수밖에 없다. 이를 그나마 ‘올바르게’ 하려면, 우리 인식의 틀을 최대한으로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의 확보 방안은, 제시문이 보여 준 것처럼, 최대한 관계를 확장하는 것이다. [1]이 세계와 나의 관계를 무한대의 것으로 볼 줄 알았다면, [2]는 바라보는 우리의 관계를 최대한 넓힌 예가 된다. 인간과 인간, 집단과 집단, 민족과 민족, 인간과 자연, 더 나아가 현재인과 후손의 관계로까지 확장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인식은 늘 확대되어 간다. 결국 참다운 보편적인 인식은 확정태가 아니라, 과정태다. 이런 큰 틀 속에서 ‘지금-여기의 인식’이 그나마 올바른 것이 될 수 있다.

우한기/일이관지 논술연구모임 대표, ilgw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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