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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 <인간의 세 시기>(1511~12). 연세대 2005학년도 정시 논술고사 문제에서 이채롭게 글 대신 이 그림이 제시문 가운데 ㈑로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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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구술 기출문제 따라잡기
물신의 노예 된 욕망 이미 늙어버린 사람들 연세대 기출 문제를 보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이번에도 기발하구나’다. ‘이미지’, ‘웃음’ 같은 게 그렇다. 학생들이 난감해 하는 건 당연지사. 그래선지 논술에서 당락이 뒤바뀌는 경우가 가장 많다. 이건 그리 나쁜 일이 아니다. 수능 점수가 좀 떨어지는 학생들에게도 그만큼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이니까. 논제와 제시문이 독특하다 해서 당황할 필요는 없다. 다른 학생들도 똑같다. 침착하게 논제와 제시문을 검토하면, 뭔가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특히 논제 분석을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다. 해결의 실마리는 거기 있다. 그걸 들고 제시문 분석으로 가야 한다. 논제 분석-욕망의 변화에 따른 ‘세월이 흘러감’에 대한 태도 변화
1. 제시문에 담긴 ‘세월이 흘러감’에 대한 생각을 ‘욕망’과 연관시켜 분석. 2.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 얼핏 보면 그리 복잡해 보이진 않는다. 아무래도 첫번째 요구 사항을 해결해야만 풀릴 것 같다. 제시문 각각은 ‘세월이 흘러감’에 대한 나름의 생각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을 ‘욕망’이라는 것과 연관지어 분석해 달라는 거다. 힌트는 ‘흘러감’에 있다. 세월이 흐르는 게 당연하다면 욕망도 당연히 흐를 것이다. 늙으면 욕망이 사라지는 게 아니고, 그 욕망의 성격이 바뀐다는 데 주목하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젊음의 욕망’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어떻게 바뀌는가를 생각하라는 거다. 여기서 끝난 건 아니다. 이 욕망의 변화를 들고, 다시 ‘세월이 흘러감’에 대한 생각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문제가 요구한 것은 ‘욕망’이 아니고, ‘세월이 흘러감’에 대한 생각이니까. 이제 정리하자. 젊은 욕망은 ‘세월이 흘러감’을 어떻게 생각하고, 늙은 욕망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 문제가 학생들에게 특히 어렵게 다가간 이유는 간단하다. 도대체 나이를 먹어 봤어야지! 그러나 이 문제는 나이와는 그리 상관이 없다. 바람직한 욕망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충분히 일반화할 수 있는 문제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다. 나이야 얼마를 먹든 진실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산다면, 누구나 젊게 살 수 있다. 반대로 나이를 덜 먹었더라도 품고 있는 욕망이 부정적인 것, 즉 ‘늙은 욕망’이라면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아주 무서워할 것이다. 제시문 분석 [제시문1] 늙은 욕망―머물기=관계의 축소 이제 제시문을 분석할 차례다. 제시문들은 나이 들어가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다. 해야 할 일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늙은 욕망이 갖는 특징을 끄집어내는 거다. ㈎에서는 어렸을 때는 나이 먹는 것을 기뻐하지만, 나이 들면 그게 무척 슬퍼진다고 한다. ㈏는 좀더 비관적이다. 억울하고, 헛되고, 실망뿐이고, 괴로움과 슬픔뿐이고…. 제시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다. 늙은이의 성격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대목이 나오니까. 이걸로 나머지 제시문을 설명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전체를 꿰뚫는 근본 원리에 해당한다. ㈐에서는 “노인들은 삶을 사랑한다”고 한다. 왜 그런가? 마지막 문장은 말한다. 욕망은 절박하게 필요한 것을 갈구하는 건데, 노인에게 가장 절박한 것은 얼마 남지 않은 삶이다. 그러다보니, 모험이나 열정처럼 앞길이 불확실한 것에 냉소적이고 어떤 일에도 확신이 없는 상태가 된다. ㈑의 그림에서, 저 뒤에 쭈그리고 앉아 해골하고 같이 있는 노인이 보인다. 그렇다. 노인은, ㈐의 설명처럼, 죽음과 맞닿아서 홀로 외로이 나앉은 인생일지도 모른다. ㈒에서는 노인의 지혜로움을 이야기한다. 젊음이 있었더라면 미인을 만났을 때 마구 덤벼들었겠지만, 노인은 그렇게 하질 않는다. 그런 모험은 ㈑의 젊은이처럼 유혹에 넘어가는 것일테니까. 이처럼 그 결과를 걱정하기에 그저 눈과 귀를 즐겁게 할 따름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모습을 시냇물에 잠겨 비바람에 시달려 온 대리석 같다고 하는 걸 봐서는, 시인 역시 이 지혜로움을 그리 탐탁찮게 여기는 것 같다. 여기까지를 정리하자. 노인은 삶 자체를 욕망한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키려 하고, 새로운 관계 맺기를 꺼려하며, 타인을 의심하고, 지나간 삶을 헛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에게 지혜로움이란 현재의 시간을 최대한 길게, 최대한 안전하게 보내는 것이다. 이제 ‘늙은 욕망’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한마디로 ‘관계의 축소’ 또는 ‘관계의 단절’이다. 이런 늙은 욕망으로 보면 세월이 흘러간다는 사실은 아주 끔찍하다. 곧 죽음을 의미하니까. 그러나 진실로 끔찍한 것은 늙은 욕망 자체가 아닐까? 진정한 인간다움을 보장하는 관계 맺기, 관계의 확장, 그리하여 나아감, 생성, 변화, 창조를 거부하는 삶이라면, 그것은 이미 죽은 삶 아닌가! [제시문 분석 2] ‘젊은 욕망’―관계의 확장=창조 이제는 ‘젊은 욕망’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논술이란 게 원래 그렇다. 핵심 원리만 찾으면, 나머지는 아주 쉽게 풀린다. 간단하게 정리하자. 젊은 욕망이란, 비록 유혹에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진실한 욕망에 따라 이웃과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관계의 증대, 관계의 확장! 그렇게 무한관계 속으로 뛰어듦으로써 무한 변화를 이루는 삶, 창조하는 삶, 이것이다. 이제 세월이 흘러감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그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로 드러난다. 그 결과가 비록 죽음일지라도 바뀔 것은 없다. 죽음 자체마저도 가슴 설레며 기대하게 된다. 모두가 겪는 것인 죽음을 제대로 보고자 하는 욕망, 그 죽음을 당당하게 맞이함으로써 생을 완성하려는 욕망, 죽음 이후에 혹시라도 뭔가가 있다면 그것을 제대로 보고자 하는 욕망 같은 게 움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젊은 욕망이다. 총정리 이제 오늘 우리의 욕망은 어떠한지, 우리 문명은 또 어떠한지를 생각할 차례다. 무릇 모든 문제를 이렇게 현대 사회와 현대인의 삶 쪽으로 들고 들어올 일이다. 주어진 틀 속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으려는 사람들, 그 틀 속에서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렇게 단 하나의 욕망, 즉 물신의 노예된 욕망만으로 세상 모든 것을 해석하고 그 틀 속에 갇혀 버린 사람들, 성공적인 노예가 되려고 이웃과 세상과 단절되어 버린 사람들, 그리하여 자신이 집착하던 것을 놓치고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이것이야말로 이미 벌써 늙어 버린 삶을 보여 주는 것 아닐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를 따지다 보면, 우리의 문명 자체가 이미 늙어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세계화라는 구호 아래 전 세계가 ‘단 하나의 욕망’으로 끊임없이 치닫고 있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저마다 ‘국가 경쟁력’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젊은이를 ‘인적 자원’으로 삼아 다그치고 있다. 겉보기엔 굉장히 역동적이고 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어진 것을 유지하고 기껏 나아간다 해 봤자 이미 최고의 가치가 돼 버린 ‘이윤 축적’으로 나아갈 뿐인 문명이라면, 이미 나아감을 잃어버린 문명이라 해도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이 속에서 함께 우리가, 우리 아이들이 이미 늙어버린 것 아닌가! 이제 늙은 욕망에서 벗어나 젊은 욕망으로 치달을 때다. 무엇이 기다릴지 모르는 무한대의 변화를 꿈꾸면서, 나와 세계가 만나 그 변화를 이룰 환상을 품고 나아갈 때가 아닌가. 이것은 나이와 무관하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첫 부분에 뫼르소의 어머니 장례식 장면이 나온다. 뫼르소가 이해하지 못했던 건, 어머니가 양로원에서 웬 노인과 연애를 했다는 사실이다. 내일이면 곧 죽을 노인이 연애를 한다? 그러던 뫼르소는 자신이 죽기 직전에 그 이치를 깨닫는다. 그렇게 연애를 한다는 것은, 새로운 삶이 시작됨을 뜻한다. 전혀 새로운 관계 맺기다. 이로써 어머니에게는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리하여 어머니에게는 죽는 날까지 가슴 설레는 나날이 열렸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죽는 날까지 지속되는 ‘젊은 욕망으로 살기’다. 우한기/일이관지 논술연구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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