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9.25 16:14
수정 : 2005.09.26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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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11일, 전국민중연대와 통일연대 등 진보단체들이 ‘미국 강점 60년 청산 및 주한미군 철수 국민 대회’를 열기 위해 위해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인천 자유공원으로 가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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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영 교사의 시사 따라잡기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 어떻게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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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원문 지난 5월 일부 시민사회단체들이 농성에 들어가면서 시작된 맥아더 동상 철거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이제 찬반론자의 전투적인 충돌로까지 번지고 있다. 어제는 민중연대·통일연대·한총련 등 철거론자들이 수 천 명을 동원하고, 황해도민회 등 반대론자들 역시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 대치하는 상황까지 빚어졌다. 다행히 물리적 충돌은 빚어지지 않았지만, ‘맥아더는 살인자’라는 노래와 ‘인천공항을 맥아더 공항으로’라는 구호가 등장할 정도로 양쪽의 간극은 깊고도 멀어졌다.
안타까운 점은 지금까지 과정에서 맥아더의 공과에 대한 사실관계 규명이나 학문적 평가는 이뤄지지 않고, 자신의 관점을 관철하기 위해 물리적 힘만 앞세웠다는 사실이다. 한편에선 맥아더 장군은 한국을 두 번이나 살려낸 구세주로 평가한다. 일제를 패퇴시켜 식민지에서 해방시키고,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적화에서 구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선 한반도 분단을 집행하고, 이로 인해 내전을 초래했으며, 전술적 오류로 피해를 가중시켰고, 대규모 원폭 투하로 한반도를 불모지대로 만들려 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천양지차는 몇 마디 구호나 몸싸움 속에서 나오는 악다구니, 일방적으로 뿌려지는 성명서 따위로는 설명될 수 없다. 6·25 당시 연합군과 인민군이 오르내리며 자신의 입장을 총칼로써 강요했던 방식과 무엇이 다를까.
이제 학문적 논의와 평가를 시도해야 한다. 학계와 지자체 등이 맥아더의 공과를 따지는 토론회를 마련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민들이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 토론에는 전후 일본과 한반도 처리, 분단, 맥아더의 전술적 성공과 실패, 대규모 원폭 사용 요청 등과 현시점에서 결과론적 평가까지도 올려져야 한다. 물론 찬반 양쪽은 귀를 열고 경청해야 한다. <한겨레> 2005년 9월12일치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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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기
맥아더 동상 철거 찬반 논란은 이제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물리적 폭력으로까지 이어져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보수적인 언론이나 단체는 마치 성역을 건드린 것처럼 발끈하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고, 또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단체들은 마치 맥아더가 우리 민족의 통일을 방해하고 우리 민족의 살상에 앞장 선 원수처럼 몰아가고 있다. 이는 모두 감정적이고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인 판단이며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에 대해 위에 제시된 사설에서는 그와 같은 행동에 앞서 맥아더에 대한 역사적인 판단을 사실적인 자료에 근거해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맥아더에 대한 논란은 반미와 친미로 이어져 그 쟁점이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각각 그들의 주장에 어떤 오류가 있는지 찾아내고, 합리적으로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서울 예일여고 교사
예상 논제 맥아더 동상 철거를 두고 그에 대한 평가가 크게 대립되고 있다. 맥아더가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는지 자신의 생각을 말해보시오.
[예시] 맥아더는 그저 냉전 체제 속에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 노력했던 군인입니다. 그의 도덕성이나 정치적 이념을 우리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준으로 평가하기에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민족에 대한 애정이나 통일 의지 같은 것이 없었다고 해서 그를 부도덕한 사람으로 몰 수도 없습니다. 그는 분명히 미국인으로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 군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역량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의 공산화를 막아낸 것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군인으로서 훌륭한 전술가였고, 그로 인해 한국 전쟁에서 결국 남한의 공산화를 막아냈습니다. 이는 칭송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전쟁이든 전쟁에서의 희생은 피치 못할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전쟁에도 휴머니즘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이념입니다. 그런데 차라리 공산화되는 것이 더 나았다는 식의 사고 방식으로 맥아더를 민족의 원수처럼 평가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는 우리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이념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의 행위에 대해 결과론적인 평가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것이 우리 민족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가치 실현에 도움이 되었는지 여부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도움말] 민감하고 구체적인 사안일수록 원론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추상화해서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자신의 입장은 분명하게 표현하되, 사실에 입각한 이성적인 판단이어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는 사회적인 맥락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위 학생은 감정적인 표현은 자제하면서 나름대로 기준을 세워 인물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다.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과 개인적 역량의 발휘라는 개연성을 이해하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 민족이 추구하는 이념적 가치를 기준으로 결과론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비교적 체계가 잘 잡힌 답변이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의 도덕성이나 정치적 이념도 보편적인 기준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개인이 그의 국가 자체는 아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맥아더가 마치 미국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 너무나 많은 이데올로기와 도덕성을 넣어서 생각하려고 한다. 그래서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는 소모적이고 극단적인 논쟁을 낳는 것이다. 위 답변에서는 이에 대한 지적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참고로 이와 같은 맥아더 논쟁에 불을 붙인 것은 김일성의 6.25 남침을 통일 전쟁이라고 주장한 강정구 교수의 발언이었는데, 이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그의 사법처리 방침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기출문제]
● 인류애를 지향하면서도 실제 행동은 매우 비인류적인 경우를 우리 사회나 국제적 관계에 서 찾아 예를 들고 이에 대한 본인의 견해를 제시하시오. (2004학년도 성균관대 수시 기출)
● 민족과 문화가 다른 집단들에서도 동일한 사회적 규제와 법이 적용될 수 있는지에 관해 보편타당성과 사회적 집단 고유의 특이성 사이의 충돌을 해소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자기 의견을 개진하시오 (2004학년도 성균관대 수시 기출)
[기출문제 해설] 국제 사회의 특징이나 국제 정세의 흐름을 묻는 문제는 종종 출제되고 있다. 첫 번째 문제는 국제 관계에서 나타나는 전쟁을 사례로 설명할 수 있다. 전쟁의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해 줄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보편적인 인류의 규범의 존재 여부와 그 실효성 여부를 생각해 보는 문제인데, 국제법의 특징과 한계를 축으로 의견을 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국제 사회의 특징에서 나타나는 실효성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제시하는 것이 좋다. 단지 교과서적인 진술에 머물러서는 좋은 답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상문제]
● 개인의 행동은 사회 구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인간의 자유 의지는 어디까지인가?
● 우리의 외교적인 노선을 펴는데 있어서 친미와 반미 중 어느 것이 국익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 6.25를 김일성의 통일 전쟁이었고, 미국이 통일을 방해했다고 주장을 한 교수의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 이를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논·구술 개념수첩
냉전체제=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양 축으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진영 간의 갈등 시기를 일컫는 말로, 직접적인 소련과 미국의 무력적 충돌은 나타나지 않고 대립과 긴장이 팽배한 시기였기 때문에 냉전(Cold War)이라고 하고 이와 같은 기류가 흐르던 1950년대의 국제 정세를 냉전체제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이 냉전의 영향 때문에 남북이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분단되었으며 후에 냉전시대의 열전을 혹독하게 치루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이 미국과 수교를 맺고, 비동맹 세력이 등장하는 등 1960년대 들어 이와 같은 긴장은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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