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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25 17:16 수정 : 2005.09.26 18:12

운명의 덫에 걸려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오이디푸스는 죽음을 앞두고 딸 안티코네와 함께 망명길에 오른다. 그림은 요한 페터크라프트의 <오이디푸스와 안티코네>(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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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연구는 풍성해서 더 이상 새로운 해석의 여지가 없을 정도이지만, 이런 물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도대체 이 어이없는 이야기에 합리적인 구석이 있는가?” 물론 전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비극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이야말로 합리성의 다양한 층위 때문에 비극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선 합리성의 관점에서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의 공통된 한계가 일관되게 비극의 동기가 됨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는 태어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비를 차지할 것이라는 신탁을 듣고 아이를 없애버리도록 한다. 여기서 그의 결정은 ‘합리적’이다. 신탁이 예견한 사건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재앙을 막고자 하기 때문이다. 명령을 받은 목자는 차마 아이를 죽이지 못해 코린토스의 목자에게 넘겨주고, 그는 후사가 없던 왕에게 아이를 바침으로써 오이디푸스는 그 나라 왕자가 된다. 성장한 오이디푸스는 신탁의 내용을 알게 되자, 코린토스를 떠나 방랑 생활을 한다. 여기서도 그의 결정은 ‘합리적’이다. 자신이 코린토스에 없으면 신탁 실현의 원인이 제거되기 때문이다.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의 결정은 합리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른 점은, 전자가 자식을 없애는 패륜을 저지른 반면 후자는 부모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운명에 대해 너무 ‘단순하게 합리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오히려 운명의 계획에 동조하는 결과에 이른다.

그들은 운명의 부조리에 대해 ‘단순 합리성’으로 대처했기 때문에 비극적 사건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운명의 필연 앞에서 인간은 어쩔 줄 모르며 ‘정신 없이’ 단순하게 행동한다. 이에 운명은 인간을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극은 시작된다. 그러나 운명에 대해 ‘종합적인 합리성’으로 대처하면 운명이 도리어 당황한다. 그것은 불합리한 것을 포용하는 합리성이다.

라이오스가 받은 신탁은 인간의 입장에서 불합리한 것이다. 이에 라이오스는 원인을 제거하는 단순 합리성이 아니라, 부조리한 운명을 인정함으로써 더 큰 합리적 가능성을 찾아야 했다. 운명은 불합리하지만 운명의 냉철한 수용은 합리적인 태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게 했더라면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천륜(天倫)을 지킬 수 있었으며, 신탁의 시험에서 벗어났을 지도 모른다.

똑똑한 오이디푸스 역시 단순히 합리적이었기 때문에 운명의 덫에 더욱 깊이 빠져든다. 그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영웅이다. 수수께끼는 객관적인 이치를 은유로 감싸고 있기 때문에 비밀스럽게 보이지만, 사실 합리적인 답을 요구한다. 하지만 신탁은 부조리하다. 오이디푸스는 그 ‘명민한’ 머리로 수수께끼를 풀 듯 운명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그의 합리성이 지닌 한계가 있다. 그가 운명을 포용하는 종합적인 합리성을 가졌더라면, 코린토스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 결과 테바이에 가서 친부의 왕좌를 차지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운명은, 운명을 담담히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반면 섣불리 선수를 치는 사람에게 운명은 역으로 딴죽건다. 운명은 누군가 ‘단순 합리성’으로 선수를 치면 오히려 그 힘을 최대한 발휘한다. 비극 작품의 플롯이 감추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인간이 충분히 합리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최소한으로 필요한 만큼만 합리적인 상황에서 비극적 사건은 시작된다. 비극은 합리성의 필요·충분 조건 사이에서 최소한의 필요조건만을 붙들고 행동하는 인간의 삶을 놀리는 장치인 것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ki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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