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9.25 17:42
수정 : 2005.09.26 15:22
얼른 집어들기가 망설여지는 책이다. 한국전쟁, 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프고 처참한 노근리 이야기를 아이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노근리, 그 해 여름>은 1950년 7월, 미군이 경북 영동군 노근리 부근 주민 400여명을 깜깜한 동굴에 몰아넣고 무차별 사격한 뒤, 동굴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은실이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살아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열 두 살 소녀 은실이는 노근리 사건으로 엄마와 동생들을 잃고, 그 사건으로 다리를 다친 아버지와 정신이 혼미해진 언니, 할머니와 함께 살아간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끔찍한 사건을 겪었고, 가족을 잃은 슬픔을 안은 채 하루하루를 견디지만 누구도 그 ‘사건’을 입 밖에 내지는 못한다.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은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마음의 생채기는 가슴 깊은 곳 검붉은 멍울이 되어 영실이와 마을 사람들을 모질게 괴롭힌다.
작가 김정희는 일제시대를 다룬 <국화>와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일을 담은 <야시골 미륵이>에 이어 <노근리, 그 해 여름>으로 ‘근현대사 3부작’을 마무리했다. 아이들에게 들려주기엔 어둡고, 무겁게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지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비극의 상처와 아픔을 먼저 들어다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 년간의 꼼꼼한 현장 취재를 거쳐 소설로 엮었다.
삶과 죽음이 갈리는 생지옥을 경험하기엔 은실이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 그러나 전쟁이나 학살 같은 역사의 비극은 무차별적으로 삶을 가해하기에 더욱 무서운 것. 슬픔이 지나쳐 차라리 비현실적인 <노근리, 그 해 여름>은 예쁘고 착하고 아름다운 것에 익숙한 우리 아이들이 ‘비극’을 통해 세상에 한 걸음 다가가는 첫 책이 될 수도 있다. 초등 고학년, 김정희 지금, 강전희 그림-사계절/8천원.
이미경 기자
friendlee@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