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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례로 미리 보는 학점 선이수제 |
‘대학 학점 선이수제(AP:Advanced Placement)’ 50년을 맞은 미국이 이 제도의 각종 부작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AP란 고등학생들이 대학 교과목 강의를 고교 재학 중 미리 들으면 이를 학점으로 인정해주는 것을 말한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수준 높은 수업을 제공하자는 취지에서 생긴 제도이다.
최근 미국의 시사주간 <유에스뉴스 앤드 월드리포트>에 실린 사례를 보자. 시카고 외곽에 있는 배링턴고등학교 12학년(한국의 고3에 해당)인 닐 팬챌은 상위권 대학 입학을 준비중인 수험생이다. 그는 지난해부터 AP에 도전해, 첫 수강과목인 ‘미국 역사’에서 A학점을 받았다. 그가 AP를 이수하게 된 건, 한 학기에 네 과목씩 AP 수업을 듣는 친구들을 보며, (대학 입시에서) 경쟁력을 높이려면 AP를 꼭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난 학기에는 통계학, 유럽역사, 화학 등 5개 과목을 수강했다. 끔찍할 정도로 학업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좋아하는 테니스팀 활동도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이고, 매일 5시간씩 숙제를 해야 했다. 팬챌은 그래도 “뒤처지기 싫다”며 가을학기에도 AP 네 과목을 신청했다.
대학 입학 경쟁 심화로 팬챌 같은 학생들이 늘면서 학생의 학업 부담은 크게 늘고, 고교 수업의 질은 떨어지는 현상이 미국 고교에 확산되고 있다. 미국에서 올해 AP 시험을 치르는 고등학생은 120여만명에 이른다. 전국적으로 73%의 고등학생이 AP 과정에 등록했다. 1980년 13만4천명과 비교하면, 15년만에 학생 수가 10배 가까이 늘었다. 시험을 주관하는 ‘컬리지 보드’에 등록된 34개 수업 가운데 한 과목이라도 들은 학생 수는 지난 5년동안에만 45%가 늘었다.
미국 교육 당국이 1955년 처음 이 과정을 도입한 목적은 우수한 학생들에게 대학 수준의 질높은 교육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대학에서 입학 전형 때 이 과정을 이수한 학생에게 가산점을 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거졌다. 너도나도 AP 수업에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립명문 노스웨스턴대학은 신입생의 90%가 AP 학점인정을 받을 정도다.
그러나 우등생이 아닌 학생들까지 AP에 뛰어들면서 수업의 질은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교사들도 별도의 수업 준비를 해야 해 업무 스트레스가 늘었다. 이젠 AP 수업을 들었다는 것만으로 대학에서 높은 학업 성취도를 얻는다고 장담할 수 없게 됐다.
국립연구센터(NRC)는 “AP 수업 증가로 교사들의 수업준비가 부실해짐에 따라, 교사들이 능동적인 문제해결과 토론보다는 단순 암기를 강조하는 시험을 치른다”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예컨대, 미국 역사 과목의 경우, 학생들에게 북미대륙 발견 이전 역사부터 독립전쟁, 산업혁명, 세계 강국으로서 미국의 출현 등 현대사까지의 모든 과정을 훑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AP 과정의 문제점들이 나타나자, 뉴욕의 필드스턴학교, 대안학교인 샌타모니카의 크로스로드학교 등은 AP 수업을 최근 없애버렸다. 대학 입시담당자들도 AP 이수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추세다. 에머리대학 입학처장 대니얼 월스는 “AP 여섯 과목을 들은 학생이 두세 과목 들은 학생보다 우수하지 않다는 사실을 신입 직원들에게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대학들은 AP에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노스웨스턴대는 경제학과 생물학 분야에서 만점인 5점을 받아야만 학점 인정을 해주고 있다. 하버드대는 모든 분야에서 5점 만점만 학점으로 인정한다는 기준을 도입하고 있다. 스탠퍼드대는 환경과학, 세계 역사 분야에서는 AP 학점을 아예 인정하지 않을 방침이다.
컬리지보드 AP 담당자인 트리버 패커는 이런 문제들이 파생된 현실을 인정하면서, 문제점 보완책들을 마련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5년간 너무 많은 학교들이 충분한 준비 없이 AP 과정을 개설해 왔다”며 “교사들은 전문적 훈련도 받지 않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여전히 매우 인기가 있다”며 “수업의 질을 높이기 위한 첫 단계로, 컬리지보드가 인증한 프로그램만 AP 이름을 내걸 수 있도록 요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제도는 우리나라에서도 정식 도입한다는 계획 아래, 지난 여름방학 때 전국 11개 대학이 고교생을 대상으로 시범운영한 바 있다. 교육부는 또다른 입시 사교육이 횡행할 것을 우려해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입시와 연계시키지 않을 방침이다. 미국의 경험을 들여다보면 섣불리 시행했다간 자칫 고교 교육을 더욱 망가뜨릴 위험이 커 보인다.
<한겨레> 국제부 윤진 기자 mind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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