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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미오와 줄리엣>(1968년)의 한 장면. 감독 프랑코 제피렐리, 출연 올리비아 허시, 레오나드 위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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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고대의 비극에서 인간은 신이 만들어 놓은 올가미나 신탁이 정한 운명에서 헤어나지 못해 비극적 삶을 살게 된다. 아가멤논에서 오레스테스로 이어지는 아트레우스 가문의 비극은 신의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작된다. 오이디푸스는 신탁의 덫에서 헤어 나오려 하나, 신탁의 내용은 결국 실현된다. 아드메토스와 알케스티스의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지만, 비극으로 끝날 뻔한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인간에 대한 신의 호의 때문에 시작되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근대 초기의 극작가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젊은 시절에 쓴 작품이지만(1590년대 초), 벌써 근대의 비극이 어떤 구조를 갖는지 잘 보여 준다. 근대의 비극은 신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만든 조건 때문에 탄생한다. 그러나 여기서 유심히 보아야 할 점이 있다. 사람들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비극의 조건을 형성하지만, 그것을 ‘신화화’하면서 마치 고대의 신탁이나 신이 정해준 숙명처럼 ‘바꿀 수 없는 조건’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결국 고대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거역할 수 없는 어떤 ‘불변의 구조’ 속에서 비극적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서두에서부터 잘 드러나 있다. “아름다운 베로나를 무대로, 세도 있는 두 가문이 오랫동안 쌓인 원한으로 또 싸움을 일으켜, 시민의 피로 시민의 손을 더럽힌다. 이 두 원수 가문의 숙명적인 허리에서 불운한 한 쌍의 연인이 태어난다.” 몬타규와 캐풀렛 가문은 사회 생활을 하는 가운데 서로 반목하는 사이가 된 것이지만, ‘두 원수 가문의 숙명적인 허리’라는 조건은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암시하는 신탁과 같이 작동한다. 그것을 증명하듯 극이 시작하자마자 두 가문의 하인과 친척들은 이 숙명적인 대립 관계를 행동으로 직접 보여준다. 그들은 두 가문이 원수지간이라는 것을 불변의 구조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구조는 오로지 죽음에 의해서만이 깨질 것이라는 점에서 어떤 신탁의 억압성보다 더 억압적이다. 그래서 이 비극은 표면적으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실 여섯 사람의 무고한 ‘죽음의 이야기’를 그 근저에 깔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의 사랑은 자연스런 것이다. 젊고 아름다운 남녀가 만나서 이루어낼 일이 무엇이겠는가. 둘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그 사랑은 우연적으로 보일 뿐 사실 필연적이다. 이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사건이 오히려 필연적이어서는 안 되는 인위적 구조의 ‘필연성’ 안에서 헤어나지 못함으로써, 두 사람의 이야기는 비극이 된다. 이들의 비극은 절대화한 인위적 구조와 자연적 표출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한 것이다. 모든 인위적인 것은 모든 자연적인 것과 충돌할 가능성을 지닌다. 이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검 앞에서 베로나의 영주가 한 말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하늘은 그대들의 기쁨인 자식들을 서로 사랑하게 해서 그 사랑으로 인해 도리어 파멸하도록 했다. 나 또한 그대들의 반목을 등한시 한 죄로, 친척을 두 사람이나 보내 버렸다.” 몬타규와 캐풀렛 가문은 상호 증오를 절대화해서 인위적 구조를 만들었고, 로미오와 줄리엣은 하늘의 뜻대로 자연스럽게 서로 사랑했지만, 그 구조의 포로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구조가 운명처럼 그들을 함부로 다룰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사랑은 희생되고 구조는 오로지 죽음에 의해 깨져 두 가문은 화해하게 된다. 이 비극은, 인간이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인간 스스로 불변의 구조를 만들어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일러준다. 즉 인간이 사회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내는 수많은 삶의 조건들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인위적 조건들이 절대화할 때, 인간 본성의 자연스런 표출은 그 조건들과 갈등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결국 비극은 탄생한다. 비극의 대단원에서 베로나의 영주는 이 점을 성찰하자고 사람들을 초대한다. “서글픈 평화를 가져오는 아침이다. 태양도 슬퍼서인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구나. 이제 가서 이 슬픈 일들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자.”영산대 교수 anemoskim@yahoo.co.kr 더 읽어볼만한 책은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으로는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 작,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의 <알케스티스>와 <메데이아> 등을 읽으면, 서구인들의 비극 정신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서는 이른바 ‘4대 비극’이라고 일컬어지는 <햄릿>, <오셀로>, <맥베스>, <리어 왕>의 독서가 서구적 비극 의식을 탐색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들 작품은 셰익스피어가 작가로서 완숙기(1600년대 초)에 쓴 것으로 다양한 비극적 상황에서 각기 다른 철학적 화두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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