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흘리개뿐 아니라 할아버지에게도 있어요. 사람은 누구나 순수한 마음, ‘동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선 무엇보다 사람과 세상을 순수하게 바라보는 마음이 필요해요. 애니메이션이란 바로 이 동심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제 막 강의를 시작하는 그의 표정이 새삼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듯하다. 겁없이 뛰어놀던 논두렁 위에 묻어 있던 동심, TV만화영화 한다는 말에 후닥닥 집으로 내달린 길에 살포시 내려앉던 동심, 동무들과 까르르 웃던 순간에도 동심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어린 시절은 얼마나 행복했던가.
'세상과 사람을 순하고 맑게 보는 마음을 지켜나가고 싶다', '사람들에게 그 소중한 동심을 끝없이 기억하게 하고 싶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한다. 그는 애니메이션 <하얀마음 백구>와 <오세암>을 제작한 마고21의 대표이자 프로듀서인 이정호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으로 위촉한 애니메이션 부문 ‘문화콘텐츠 앰배서더(홍보대사)’인 이정호 대표가 지난 9일 안산여자정보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빠져버리다
스물 아홉, “그림도 잘 못 그리는” 그가 방송국의 애니메이션 담당 PD가 돼 직업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접하게 된 때가 엊그제 같다. 그런데 어느덧 1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는 “하면 할수록 어렵게만 느껴져 늘 ‘배운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이 애니메이션”이라며, 학생들에게 자신이 걸어온 길을 차근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 창작 애니메이션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여서 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수입해 녹음 연출하는 일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어느새 그는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푹 빠져 제작에 대한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로봇 애니메이션인 <영혼기병 라젠카>가 그즈음 탄생했다.
애니메이션을 생각하면 왠지 모를 용기와 모험심까지도 생겨나던 때가 있었다. 1997년 IMF로 힘들던 때, 방송국을 나와 ‘혈혈단신’으로 TV애니메이션 시리즈 <하얀마음 백구>(이하 <백구>)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창 인기였던 모 컴퓨터의 진돗개 광고 이야기에 기반을 둔 이 작품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백구>는 심지어 애니메이션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던 부모들마저 아이들과 함께 TV 앞에 앉아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으며, PC게임 등 다양한 상품들로 제작돼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이 대표가 <백구>의 성공으로 얻은 것은 컸다. 그것은 곧 ‘우리것’의 정체성과 매력에 대한 깨달음과 확신. 나 혼자만의 독특한 느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 국경을 뛰어넘어 모두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힘이 우리 안에 들어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이 잘 하는 것보다 우리가 잘 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 우리 아이들은 누구나 양질의 만화를 보며 자랄 권리가 있는데 너무 일본 애니메이션만 보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늘 안타까웠으니까요.”
‘따뜻한, 우리 이야기’를 말하자
그는 안시페스티벌 그랑프리에 빛나는 <오세암>과 관련된 영상물들을 학생들에게 보여줬다. 영상물과 함께 그가 전하고 싶은 다른 무엇도 아닌 ‘따뜻한 마음’이었기에, 애니메이션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정채봉 시인의 삶과 글, 시인의 마음을 들려주고자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정채봉 시인이 평생을 두고 그리워한 어머니. 그 그리움을 담은 슬픈 동화를 이 대표 자신이 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어했는지, 그 마음이 어떻게 모든 사람과 통할 수 있는지 알려주고자 했다.
“<백구>와 <오세암>의 공통점이라면 흔한 얘기라는 것이죠. 어디에서든 들어봄직한, 친숙한 이야기라는 것. ‘엄마 찾아 삼만리’나 ‘오세암’이라는 암자의 오래된 불교설화가 뒤섞인 이렇듯 흔하고, 많은 사람이 익히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 만들어야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어요. 그리고 물론, 따뜻한 마음과 뭉클한 감동을 줄 수 있어야죠.”
시인이 가졌던 따뜻한 마음을 이 대표는 애니메이션 속에 조금이라도 더 담아보고자 노력했다. 지금은 자신이 학생들에게 그 마음을 전달하고자 한다. 이 대표는 학생들에게 '우리의 따뜻한 이야기'에 관심가지길 당부했다.
고전을 많이 읽고, 낙서를 즐겨라
이정호 대표는 애니메이션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야기와 캐릭터라고 강조하고, 좋은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서는 평소 동서고금의 고전명작들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일본의 초기 애니메이션들 대부분이 <빨강머리 앤>, <소공녀>, <캔디> 등 유럽의 동화, 혹은 잘 알려진 만화 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과, 미국 디즈니사의 대표적 작품들 또한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등 고전명작들을 기초로 한 작품들임에 주목할 것을 강조하면서 ‘고전의 힘’이야말로 새로운 창작력의 기반이 된다고 전했다.
또, 늙지 않는 캐릭터의 매력과 그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많은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애니메이션 작업을 할 때 제일 짜릿한 느낌을 받을 때는 ‘캐릭터가 말을 하기 시작할 때’랍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그러하듯 하나하나의 캐릭터에 애정을 쏟을 수밖에 없죠. 실제로 캐릭터는 자식 같은 존재이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을 대신해주는 애니메이터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이니까요.”
그는 마지막으로 글쓰기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낙서라도 좋고, 체계화된 글이 아니더라도 좋으니 메모지를 늘 들고 다니며 뭔가 써보고 그림도 그려보는 ‘낙서하는 습관’을 들여서 끝없이 샘솟고 있는 아이디어와 창의력을 기억하고, 발전시키라 말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려면 최소한 20년은 걸려요. 여러분에게는 앞으로 20년 이상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동안 더 멀리 보고, 좋은 체험을 많이 하고, 그림 실력과 음악적 안목도 키우고, 명작들을 접해보세요. 우리나라는 지금 애니메이션에 관한 한 5대 강국 정도이지만 곧 일등이 될 수 있다고 믿어요. 지금 이 강연을 듣는 여러분들 중에서도 좋은 일꾼들이 많이 나오길 바랍니다.”
끝없는 질문, 질문, 질문
질문 시간이 되자 학생들은 잠시 쭈뼛거리던 몇 초가 지나기도 전에 질문의 포문을 열었다. 현실적인 어려움이나 문제점에 대한 질문들이 학생들의 입을 통해 구체적이고도, 숨김없이 쏟아졌다.
‘애니메이션 PD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실제로 도움받을 수 있는 책들은 어떤 게 있을까요?’,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왜 그렇게 많은 거죠?’.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든 작품들이 망치게 되는 걸까요?’.
이정호 대표는 학생들의 열의 넘치는 각 질문들에 솔직하고 친절한 답변으로 응했다. 그리고 ‘멀티플렉스 환경’ 등으로 척박한 국내 애니메이션 환경을 학생들이 금세 자라나 바꿔나가길 기다린다고 덧붙였다.
오늘 이 대표의 강연을 들은 조희주 학생은 “평소 게임제작 쪽으로 진로를 결정해놓고 있었는데 이정호 PD님의 강연을 듣고 나니 애니메이션 쪽으로도 관심이 많이 가고, 예전에는 몰랐던 제작과정이나 많은 분들의 노고를 알게 되어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게 됐다”고 말하고, “앞으로도 우리나라의 애니메이션들이 더욱 많이 나와서 세계시장에 우뚝 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또 이지영 학생은 “본래 꿈은 일러스트레이터이지만, 애니메이터나 모두 그림을 그리는 직업이니 만큼 앞으로 내가 어떠한 느낌과 생각으로 그림을 그려야 할지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됐다”며 “좋은 강연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여러 번 덧붙였다.
|
[인터뷰] “휴머니티, 지금 내가 ‘여기’ 있는 이유”
이정호 마고21 대표
- 오늘 강의 소감은?
"정말 강의를 듣는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각각 그 느낌이 다르다. 작년 앰배서더 강연 때는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했었는데 오늘은 또 그때와 사뭇 다른 느낌이다.
사실 고등학생들에게 강연한 것은 오늘이 처음인데, 실질적으로 진로에 대한 고민이 왕성한 시기인 학생들을 보면서 내가 그들 관심사의 정보창구로서 역할할 수 있다는 게 기분이 참 좋았다.
특히 강연에 참석한 학생들이 우리 애니메이션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활발히 질문하는 태도여서 한편으론 우리 애니메이션의 희망까지 느꼈다."
-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일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본래 다큐멘터리 PD가 꿈이었다. 처음엔 취업 문제도 있고 어찌어찌 떠밀려(웃음) 투니버스 개국부터 시작해 이쪽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
다큐멘터리 PD에 대한 꿈도 내가 항상 추구하고픈 휴머니즘에서 나온 생각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순수하고 가장 위대한 마음인 동심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따뜻하고 맑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되도록 하고 싶었다. 물론, 지금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그 일을 해나가고 있다."
- 그 열정으로 감독을 해보고픈 생각은 없는지?
"기회가 되면 시나리오는 꼭 한번 써보고 싶다. 그러나 작화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힘든 일이고 말고.(웃음)"
- 사실 창작 환경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는 듯 보이는데
"늘 만들자, 만들자 하면서 손꼽던 ‘창작인 회의’를 곧 만들 것 같다. 1997년부터 지금껏 여러 가지 일에 가려 시도만 수차례 있었던 일이다.
아마 연말쯤 발족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본다. 젊은 애니메이터들과 기존의 애니메이터 사이의 좋은 가교 역할을 해내는 것이 이 모임의 1차적 목표다."
- 앞으로의 계획은?
"현재 <몽실언니> 개발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 내년 겨울 개봉을 목표로 작업을 추진중이다.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TV유아물도 조만간 계획에 들어갈 듯싶다. 현재로선 욕심을 많이 내지 않으려고 한다. 대신 꾸준히 해나가고, 또 후배들이 잘 활동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 학생들에게 해주고픈 말?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는 시각이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에 대해 너무나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기본까지도 어려운 것이 바로 애니메이션이다. 쉬워 보이지만 절대로 우습게 볼 수 없는 장르.
정말 어렵기 때문에 제대로 하기 위해선 심사숙고 끝에 얻은 확신과 결정, 많은 노하우가 필요하다. 쉽게 접하고, 쉽게 상처받고, 쉽게 등을 돌리게 되는 일은 없어야겠다. 애니란, 정말 어렵고도 소중한 것. 이를 해내기 위해서는 재주도 재주이거니와 인성을 가꾸는 일이 먼저 이뤄져야 할 것이다."
|
|
|
홍지연 기자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