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0.23 20:04
수정 : 2005.10.23 20:04
재일동포 작가 성장동화
“가난도 나누면 따뜻할 수 있어”
먹을 게 없어서 굶기를 밥먹듯이 하던 어린 시절을 얘기하면 요즘 아이들은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왠 뜬금없는 옛날 얘기냐’고 핀잔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렇지만 야스모토 스에코, 너에겐 밥은 정말 가까이 하기에 먼 존재였더구나. 보리밥 한 그릇이라도 먹는 날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고, 고구마 한 개, 죽 한 그릇으로 때우는 날이 허다했다니 어느 시대 얘긴가 싶다. “반찬은 늘 야채 절임이나 소금에 절인 다시마였고 그것도 없을 땐 간장 뿐”이었다니, 가슴이 절로 아린다. 그래도 넌 “젓가락으로 밥을 뜨면, 젓가락 사이로 주르르 보리가 떨어지는 꽁보리밥이라도 고마울 따름”이라며 감사해 하더구나.
집은 또 어떻고. 탄광 임시직인 큰오빠 덕에 겨우 사택 한 귀퉁이를 얻어 살지만 그것도 잠시, 큰오빠가 일자리를 잃자 이집저집 떠돌이 신세로 전락한 네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40평 아파트도 좁다고 60평 아파트로 이사가자고 조르는 요즘 아이들을 어떻게 봐야 할지 그저 쓴웃음이 나온다.
‘똥 구멍이 찢어지는’ 가난은 너의 학교생활에도 큰 걸림돌이 됐더구나. 수업료를 낼 돈이 없어, 교과서를 살 돈이 없어 2학년과 3학년 때 수업의 3분의 1을 빼먹었다니, 돈이 정말 ‘웬수’다. 하긴 당장 내일 먹을 게 남아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학교는 사치일 수도 있겠지. 학급 사진첩에 실린 네 사진에 스웨터 가슴 부분을 꿰맨 자국이 선명하게 나있는 것은 그나마 학교에 갈 수 있어서 일어난 일이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따지고 보면 가난은 스에코 너의 책임은 아니야. 3살 때 엄마를, 8살 때 아빠를 잃은 뒤 21살 먹은 큰오빠에게 모든 생계를 의지해야 했으니, 가난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 게다가 재일동포의 자녀라는 사실은 일제시대 ‘조센징’의 연장선상에서 너희 가족을 괴롭혔지.
하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도 스에코 너의 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했다. 쌀이 없어 도시락을 하나밖에 못쌌는데 그걸 “작은오빠가 더 배고플 거”라며 갖다줄 때의 너의 마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어. 너는 또한 항상 친구들과 선생님을 배려하고 그들에게 다정스럽게 대했지. 집도 밥도 없는, 정말로 궁색한 집안의 너를 친구들이 반장으로 뽑아준 게 너의 그런 따뜻한 마음을 증명해준 거 아니겠니?
무엇보다 너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참 눈물겹다.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아빠를 위해 수시로 위패 앞에서 촛불과 향을 피우고 절을 하는 10살짜리 소녀를 요즘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또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큰오빠나, 돈이 있든 없든 밤 늦은 시간까지 공부에 열중하는 작은오빠를 위해 기도할 때의 마음과 남의집살이를 하러 가는 언니를 떠나보낸 뒤 “눈물이 쉬지 않고 치밀어 올”랐다는 너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말 안해도 알 것 같다.
결국 큰오빠는 나가사키로, 언니는 사가로, 작은오빠는 도쿄로, 너는 친구인 료코 집으로 네 남매가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는데, 네 말대로 “지금은 모두 고생을 하고 있지만, 반드시 우리 네 남매에게도 밝은 등불이 환하게 비출 날”이 언제 올지, 나도 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마.
야스모토 스에코 지음, 조영경 옮김. 허구 그림. -산하/8500원.
박창섭 기자
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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