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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슈테판 마르트라는 사람이 짓고 그려 만든 책 <돈키호테>의 삽화. 그림 출처 www.stefanmart.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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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슬픈 얼굴의 기사’는 신호를 보낼 뿐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이성·현실의 확실성 비웃듯… 환상의 여행 떠난 돈키호테그가 띄운 논리 너머의 ‘신호’
“델포이에 있는 신탁의 주재자는 말하지도 않고, 감추지도 않으며, 신호를 보낼 뿐이다.” 기원전 6세기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남긴 말이다. 철학의 역사에서 헤라클레이토스 하면, 로고스와 변증법을 떠올릴 것이다. 그는 인간 이성이 추구해야 할 세상의 원리로서 로고스를 주창한 사람이고, 이분법적 변증 논리의 창시자로 해석되기도 한다. 19세기의 철학자 헤겔은 “내 논리학에 받아들이지 않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명제는 하나도 없다.”고 까지 말했다. 하지만 위의 문장은 우리가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배워야 할 또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신호를 보낼 뿐이다’ 라는 말의 의미를 포착하는 데 있다. 그것은 분명히 말해주는 것도 아니고 숨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징표를 보이며 모호하게 전달하는 것일 뿐이다. 확실한 소통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통의 단절도 아니며, 오로지 소통의 무한한 가능성이다. 이는 명증성과 논리 적합성이 철학적 소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로고스와 변증법의 주창자에게도 명확한 이성만이 철학은 아닌 것이다. 철학은 모호한 환상의 자유를 향유함으로써 성숙해진다. 보르헤스가 말했듯이, 철학은 예술적 창조물만큼 환상적일 수 있다. 이러한 명제를 지금으로부터 꼭 400년 전에 실천해 보여준 작품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1605년)다. 이 작품은 사람들이 편안히 기대고 싶어하는 이 세상의 모든 확실성을 ‘재기 넘치는 시골 귀족 돈키호테 데 라만차’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야기들의 유희’로 난타하면서 모호성의 철학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소설의 시작부터 모호성의 전략은 발동을 건다. 세르반테스는 ‘서론’에서, 한참 소설을 구상하고 있는데 똑똑한 친구가 찾아와서는 “명백한 문장을 써서 혼동이나 애매모호함을 막고 자네의 생각을 잘 알아들을 수 있게 표현하라”고 조언했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야기의 시작 부분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옛날, 그 이름을 기억하고 싶진 않은 라만차의 어느 마을에… 시골 귀족이 살고 있었다” 라고 서론의 의도를 풍자하며 곧바로 전복시킨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날’이란 ‘옛날 옛적’보다 현재와 가까우면서도 훨씬 더 모호한 것이며, 장소가 어딘지는 라만차라는 말로 현실성 있게 드러내면서도 ‘기억하고 싶진 않다’고 슬쩍 가려 버린다. 모든 이야기의 전제 조건인 시간과 공간을 일단 모호한 세계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쓰는 것이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이야기는, 진실 드러내기와 감추기, 현실들과 환상들의 혼재, 미친 자의 명민함과 정상인의 멍청함, 논리 정연한 엉터리 논리, 마법 걸기와 마법에 걸리기, 살아 있는 꿈과 꿈꾸는 삶, 의도된 실수 또는 실수의 미학, 독자와 작가의 치환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예를 들어, 돈키호테가 몬테시노스 동굴에 내려가 경이로운 궁전에서 영접을 받는 광경은 꿈과 현실 그리고 마법과 이성이 환상적으로 뒤섞인 세상을 보여준다. 이는 존재의 의미를 한없이 가볍게 해 주면서도 무한한 변화 가능성의 지평으로 확장시킨다. 이런 가벼움으로 인해 존재가 무의미해지는 게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초월하는 것이다. 몬테시노스 동굴의 모험에 대해 이야기 속 작가는 말한다. “여태까지 일어난 모든 모험은 그럴듯한 개연성을 지닌 것들이지만 동굴의 모험은 합리적인 범위에서 너무나 벗어나 이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할 여지조차 찾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 이야기의 거짓이나 진실 여부를 뚜렷이 확인하지 못한 채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그러므로 현명한 독자여, 그대가 알아서 판단해주기 바란다.” 그는 설명하지 않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
<돈키호테>에서 광기, 환상, 모호성은 이성, 현실, 명확성과 대척점에 있지 않다. 대척점에 있다는 인식은 이분법의 틀에 메어 있는 것이다. 이들은 섞여 놀고 있다. 그럼으로써 이분법을 극복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섞임은 경계를 없애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계 없음, 섞임 그리고 모호성은 너무 많은 가능성에 열려 있으므로 그것을 제공하는 사람이든 그것을 대하는 사람이든 힘들게 할 수 있다. 확실성의 편안함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신나는 파괴’를 결행하는 말라깽이 기사 돈키호테가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는 이유도, 때론 그의 모습이 비통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느 날 저녁 산초는 돈키호테를 ‘슬픈 얼굴의 기사’ 라고 부른다. 돈키호테가 왜 그랬냐고 묻자, 산초는 횃불에 비친 그의 얼굴이 너무나 비통해 보여서 그랬다고 답한다. 별호가 필요했던 돈키호테는 그것이 마음에 들어 앞으로는 자신을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 <돈키호테>를 읽는 것은 조금은 비통한 마음으로 별난 모호성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독자는 어떤 명확한 메시지와 교훈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선명한 줄거리가 없어서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는 이 대작을 읽고 나면, 몸과 마음과 머리가 삼위일체 되어 훌쩍 커버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슬픈 얼굴의 기사’는 무한한 가능성을 담은 신호를 보낼 뿐이기 때문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ki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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