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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청소년 연설대전에 참여한 학생들이 청중들 앞에 나와 직접 쓴 연설문을 바탕으로 한 연설을 하고 있다. 사람에게배우는학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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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교육] 진화하는 스피치교육
“저는 글쓰기가 싫어서 제가 말하면 엄마가 받아써 줬는데 대통령은 최순실이 써준 것을 꼭두각시처럼 그냥 읽었습니다. 대통령은 자신이 국가를 좋게 만들려는 생각을 못 하나 봅니다. 금붕어에게는 미안하지만 금붕어 지능 같습니다.”
지난 12일 민중총궐기 때 광화문 광장에 나온 한 초등학생의 ‘사이다’ 발언이 화제다. 광장 시민발언대에 나온 이들 가운데는 이 친구처럼 “네가 대통령 해야겠다” 소리가 나올 만큼 ‘말 시원하게 잘하는’ 청소년이 적지 않다.
과거 교육 현장에서 손을 들고 말할 기회는 반장한테만 주어졌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스피치’(청중과 공감대를 형성하길 바라는 목적으로 의견을 조리 있게 말하는 것)는 모든 아이에게 요구되는 역량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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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말하기’ 아닌 ‘내 생각 말하기’에 방점
부모 세대는 어른들이 써준 글을 얼마나 당당하게, 정확한 발음으로 말하는지 기법 위주 ‘스피커 교육’에 익숙하다. 요즘 청소년들이 접하는 스피치는 삶 속에서 이야깃거리, 즉 ‘주제’를 잡고, 그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할 것인지 고민해서 글 그리고 말로 구현해보는 ‘생각하기-쓰기-읽기-말하기’ 등 종합 교육의 과정이다. 전문가들은 “과거 ‘스피커’(speaker)를 기르는 말하기 교육이 있었다면 요즘은 여기에 더해 ‘텔러’(teller)를 기르는 교육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설명한다.
“공포 속에서 저는 그들에게 살려달라 외쳤고, 저의 공포 어린 목소리에 그들은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 저는 불과 1년 전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 순간 제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피해의식! 원인을 알았으니 해결할 일만 남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요? (삶은 달걀을 한 손으로 깨부수며) 깨부수면 됩니다! 그들이 나를 욕할 때, 때릴 때 가만히 당하지 않았고, ‘하지 말라!’ 얘기했습니다. 제 행동 변화에 따라 그들도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 우리는 생각보다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것에 너무 길들어 있습니다. (…) 피해의식? 본인이 ‘극복’해야 합니다. 물론 사회적 문제 또한 있습니다. 하지만 내 문제이건 사회적 문제이건 피해의식을 이겨내는 첫걸음은 자기 자신이 피해의식을 부숴버리는 데서 시작합니다.”
교육현장서 ‘말하기’ 중요해져 웅변식 건조한 발표하기 넘어 마음 울리는 ‘텔링교육’ 대세 내 일상서 말하기 소재 찾아 쓰기-읽기-무대 서보기 경험 청소년 연설대전·개꿈콘서트 등 멘토링식 연사교육 진행하기도
지난 1월 제5회 대한민국 청소년 연설대전(이하 연설대전)에서 인기상을 받은 서울금융고 2학년 김동희양의 약 5분짜리 연설 가운데 일부다. 중학교 때 학교폭력으로 힘들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 일어서는 방법’이라는 연설을 했다. ‘당신 마음속 달걀인 ‘피해의식’을 깨부숴라!’ 삶은 달걀을 한 손에 쥐고 깨는 제스처로 호소력 있는 연설을 하기까지 많은 노력을 했다. 장차 ‘연설가’를 꿈꾸는 김양은 “‘자기주도형’으로 스피치 공부를 했다”고 설명했다. 말하기 관련 책을 읽고, 유튜브 동영상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 등 유명인들의 연설을 보고 분석도 했다. 연설대전 참여는 청중 앞에서 말할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 깊게 생각할 기회를 준 ‘매우 귀한 경험’이었다. “어떤 말을 할 때 그것이 곧은 생각인지 깊이 들여다보고, 더 맑은, 나만의 소리를 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해줬습니다.”
연설대전은 사람에게배우는학교, 다준다연구소가 주최하는 행사로 일종의 ‘말하기 교육 멘토링’이다. 참여 신청을 한 학생(약 70명) 가운데 10~15명의 본선진출자를 가리고 이들이 대전에 나가는 방식이다.
수상자를 가리는 데 큰 의미를 두진 않는다. 학생들이 자신만의 연설을 하기까지 멘토들이 무료로 스피치 관련 교육을 해주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교육은 기자,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글쓰기·말하기 관련 전체교육을 비롯해 반을 나눠서 연설문을 써보고 스피치 연습을 본격적으로 해보는 담임교사 멘토링 등으로 이루어진다. 수상, 등수가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본선에 진출한 청소년한테는 모두 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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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청소년 연설대전은 청소년들에게 스피치 및 연설 교육을 해주고, 연설하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종의 ‘말하기 교육 멘토링’이다. 사람에게배우는학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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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연사 발굴 진로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소셜벤처 담넘어의 개꿈콘서트. 올해부터는 학교 신청을 받아 학교에서 6주간 관련 교육을 진행하고, 연사가 학교 무대에 서도록 콘서트까지 열어주는 연계형 개꿈콘서트도 진행한다. 수원시와 함께하는 개꿈콘서트 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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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치에서는 ‘기술’이 중요하다 생각하기 쉽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무엇을 말할 것인가’, 즉 나만의 말하기 콘텐츠를 발견하는 일이다. 프로그램에는 ‘하루를 어떻게 보냈어?’, ‘꿈이 뭐지?’ 등 담임교사 그리고 친구들과 일상에서 경험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서적 교감을 하는 시간이 있다. 이 과정에서 전하고픈 메시지를 길어 올린다. 그동안 참여한 청소년들이 내놓은 주제는 세월호 사건부터 시작해 우리나라 교육 문제까지 사회적 의제가 담긴 것도 있지만 사랑, 꿈, 부모님과의 관계 등 일상 밀착형 주제까지 다양했다.
말을 하려면 먼저 생각하기, 쓰기, 읽기 등이 기본이 돼야 한다. 생각을 연설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이런 공부를 스스로 해볼 수 있다. 연설대전에는 또래끼리 서로의 연설문이나 스피치를 보고 평가하는 활동도 있다. 김양은 “연설문 내용부터 태도, 발음 등 부족한 것들을 서로 살펴봐 주는 것 자체가 공부였다”고 했다. 사람에게배우는학교(www.togetherdream.com) 정상근 대표는 “연설대전의 핵심은 ‘경쟁 없는 협동’인데 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코멘트를 해주는 등의 과정에서 내가 누군가와 함께 뭔가를 배우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마음도 안고 간다”고 했다. 오는 12월1일부터 25일까지 제7회 연설대전(2017년 1월21일 본선 진행)에 참가할 학생 신청도 받고 있다.
평택 현화중 김은미 교사는 지난해 학교 안에서 희망 학생 약 30명을 모집해서 ‘글쓰기→스피치→연설대전 참여’까지 이어지는 소규모 스피치 멘토링을 시도해봤다. 2014년 사람에게 배우는 학교를 통해 연설대전 정보를 접하고 학교에서도 교육에 방점을 찍은 ‘전교생 꿈 발표대회’라는 작은 연설대전을 열어봤다.
주제는 ‘꿈’이었다. 아이들은 잘 드러내지 않던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교사 입장에선 진로 교육에 도움도 됐다. 김 교사는 “이 과정을 통해 그냥 까불이로 보였던 아이들의 숨은 면모를 알게 됐다”고 했다. “꿈을 야구선수에서 야구해설가로 바꾼 친구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젊었을 때 야구선수를 하셨는데 부상으로 접으셨더라고요. 아들이 똑같은 전철 밟는 걸 원치 않았나 봐요. 아이는 야구를 너무 좋아하는데 관련된 직업이 없을까 찾다가 좋아하는 야구 관련 일이면서 아버지 걱정도 덜 수 있기 때문에 야구해설가를 꿈꾸게 됐다고 했죠. 굉장히 속 깊은 고민을 했다는 걸 이 친구 스피치를 통해서 알았어요. 다른 친구들에게 ‘여러 여건으로 꿈을 펼치기 어려울 때 다른 다양한 길을 찾아볼 수도 있다’는 말을 할 때 이 사례를 많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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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찾아가 ‘꿈’ 주제 연사 교육 해주기도
남수원중 인수교군은 올해 1학년 친구들이 다 모인 가운데 ‘꿈으로부터 온 슬럼프’라는 제목의 스피치를 했다. 태어나 처음 서본 큰 무대의 이름은 ‘개꿈콘서트’. 스포츠아나운서를 꿈꾸는 인군은 아나운서가 되려면 발음이 중요하다는 말에 볼펜을 물고 발음해보는 등 열심히 노력했었다. 하지만 방송부 시험에서 탈락하며 슬럼프가 왔다. 인군이 친구들 앞에서 펼친 이야기는 이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해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인군은 “말하는 걸 좋아하면서도 남들 앞에 나서서 선뜻 말할 정도의 자신감은 없었는데 연사 경험 뒤 ‘저요!’ 하며 손을 번쩍 들고 발표하는 적극성이 생겼다”고 했다.
이 개꿈콘서트는 또래연사 발굴 진로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소셜벤처 담넘어(overdam.co.kr)가 진행한 ‘연계형 개꿈콘서트’의 일환이다. 이 소셜벤처는 청소년들을 위해 자체 발굴한 또래연사가 등장하는 콘서트를 열어왔다. 올해부터는 학교 신청을 받아 학교에서 6주간 관련 교육을 진행하고, 교육을 통해 발굴한 연사가 자신의 학교 무대에 서도록 콘서트까지 열어주는 연계형 개꿈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인군은 “프로그램 가운데서도 ‘기억의 조각’이 제일 힘들면서도 재미있었다”고 했다. 이는 청소년의 일상 가운데 ‘사건’이라 말할 수 있는 특별한 기억들을 네 가지 테마(‘내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났던 경험’, ‘가장 좌절했던 경험’, ‘가장 큰 성취를 했던 경험’, ‘처음 내 꿈을 마주한 경험’ 등)로 뽑는 작업이다. 각 상황 그리고 경험마다 상황과 내 행동이 어땠고, 그 경험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놀이식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담넘어 구효정 대표는 “많은 친구들이 자신만의 메시지가 없는 상태에서 발음, 제스처 등 기술적인 부분만을 배우는데 메시지만 뚜렷하면 방법론을 익히는 건 큰일이 아니기 때문에 말할 내용을 고민하게 하는 데 시간을 많이 투여한다”고 했다. “학생들이 남과는 다른 경험을 했다거나, 이룬 게 많아야 연사가 될 수 있다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스피치 준비하면서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공부만 하다가 ‘아 맞아. 내가 이런 걸 좋아했지’ 하고 뒤늦게 깨닫는 것도 많이 봤다.”
담넘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주목하는 주제는 ‘실패담’이다. 구 대표는 “어떤 상황에서 실패, 좌절한 다음 그것을 극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고, 자신도 그 경험을 정리해 말하면서 그 가치를 다시 곱씹으면 좋겠다는 뜻이 있다”고 했다. 올해 연계형 개꿈콘서트는 수원 지역에서 7개 학교가 참여했다. 담넘어는 내년 연계형 개꿈콘서트에 참여할 중·고교 신청도 받고 있다.
김청연 <함께하는 교육> 기자
carax3@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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