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14 23:19
수정 : 2017.08.14 23:32
청소년 모의재판 경연대회 현장
대구지방법원서 열린 청소년 모의재판
‘어린이 건강권’ 소재 날 선 공방
10여명 팀 이뤄 ‘법’ ‘재판’ 공부해
판사·검사·변호사 역할 맡으며
사건 분석 및 법조문 찾는 경험
‘법’ 넘어 민주시민교육 체험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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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대구지방법원 신별관에서 ’제5회 중·고생 모의재판 경연대회’가 열렸다. 대구 성화여고 ’에스피(SP)성화’ 팀이 모의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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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번호 2017 고합1234호. 피고 지소윤은 비의료기관인 ‘아이들을 건강하게 해주자’(이하 아건해)를 만들었죠. 의학적 근거가 없는 치료법을 통해 많은 아이들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 사실을 인정합니까?”
검사 ‘박동원’ 역을 맡은 경북 구미시 옥계동부중학교 3학년 박동윤군의 증인 신문이 제법 날카롭다.
지난 7일 오후 1시30분 대구지방법원(이하 대구지법) 신별관에서 ‘제5회 중·고생 모의재판 경연대회’가 열렸다. 경연대회 본선이 열린 법정 202호실 문밖에는 ‘개정중’이라는 알림등이 켜졌고, 학생들은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대구지법 판사에게 사건 개요를 설명한 뒤 20분 동안 재판을 진행했다.
본선 진출팀인 만큼 판사복과 검사복을 갖춰 입고, 검사의 ‘기소요지 진술’ 및 피고인의 ‘진술 거부권 고지’, 변호인의 ‘반대 신문’과 양측 증인들의 ‘증인 선서’까지 여느 형사재판 진행 풍경 못지않아 방청객들도 집중하며 재판 과정을 지켜봤다.
■ 법 공부하며 ‘안아키’ 관련 사건 풀어내
박동윤군은 빔프로젝터를 이용해 비의료기관이면서도 극단적인 자연주의 치료법을 사용해 아이들의 건강을 위협한 ‘아건해’의 죄를 증명해냈다. 검사로서 각종 ‘증거 자료’를 화면에 띄우고 “피고인의 행위는 의료법 제27조 1항 및 아동복지법 제17조를 명백히 위반한 행위”라고 강조했다.
피고 지소윤 역의 지수인양, 변호인 최아인 역의 최권호군을 비롯해 검사 쪽 증인으로 출석한 의사 역의 이제민군 등 10명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 모의재판 경연대회에 도전했다. 흔히 여름방학에는 학원 보충수업을 받거나 캠프 등에 참가하지만 옥계동부중 3학년 학생들은 ‘아르아이피 크루’(RIP Crew, 이하 크루)라는 모의재판 팀을 꾸려 한 달 넘게 구슬땀을 흘렸다.
크루 팀의 재판 시나리오를 쓴 양나연양은 “지난 5월 대구에서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이하 안아키) 커뮤니티 사건이 큰 이슈가 됐다”며 “동생을 비롯해 우리의 건강과 직결된 사회적 문제라 관심이 생겼고, 신문기사 등 사건 자료를 꾸준히 찾아보며 시나리오의 틀을 잡아갔다”고 했다.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를 방치하거나 화상 부위를 온수로 목욕시키는 등 근거 없는 비의료적 행위로 인해 고통받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모의재판을 통해 내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을 다루고 싶었죠.”
판사 역할을 한 윤호진군은 “장래 희망 중 하나가 법조인인데, 판사복을 입고 재판에 참여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막중한 책임과 도덕성이 요구되는 직업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크루 팀을 지도한 박정희 교사는 “선생님이나 부모님 등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이 순수하게 법에 관심 갖고 모의재판을 준비했다”며 “자료 조사, 증거의 적합성 등을 판단하며 활발하게 토론하는 과정이 있었고, 해당하는 법 조항을 찾아가며 자연스레 ‘사회 공부’가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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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역을 맡은 옥계동부중 3학년 박동윤군이 증인 신문을 하고 있다.(사진 왼쪽) 변호인 역을 맡은 최권호군이 검사에게 반박 변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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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사 성추행 사건’ 재구성해 법정 올리기도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잇따라 공론화되는 ‘교사 성추행 사건’을 ‘사제 간 커터칼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재구성해 모의재판을 진행한 팀도 있다. 대구 성화여자고등학교의 ‘에스피(SP)성화’ 팀은 3학년 학생 8명이 힘을 합해 본선에 진출했다.
성화여고 3학년 신류빈·윤현정양은 “최근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익명 계정을 통해 전국 학교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사 성추행 사건’, ‘교사에 의한 체벌·협박 사건’ 등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고 했다. 신양과 윤양은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뒤 교실 책상 위에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한 고교 1학년 ‘나약해’라는 가상의 학생과 평소 그에게 폭언을 일삼았던 교사 ‘박수현’을 형사재판 대본에 등장시켰다.
“피고 박수현은 학생에게 폭언을 내뱉고 흉기를 들어 협박하신 것을 인정합니까? 선생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피해자인 학생들이 ‘폭언’이라고 느꼈습니다. 가해자인 선생님이 ‘그저 장난이었다’고 하면 용서가 되는 걸까요?”
에스피성화 팀에서 검사 역을 맡은 3학년 김가영양은, 교사이자 피고인 역을 맡은 박수현양을 신문하며 ‘교사의 일방적인 폭언이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강조했다. 김양은 “아직도 한국의 많은 학생들이 일부 폭언·폭력 선생님들에게 고통을 받고 있다”며 “검사 역할을 맡아 친구들과 형법 제283조 협박죄 등을 공부하고 ‘공소사실 낭독’, ‘피고인 신문’ 등 재판 절차를 하나씩 배워가면서 민주시민으로서 법에 대해 알고 있는 게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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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의재판 경연대회를 마친 옥계동부중 ’아르아이피 크루’(RIP Crew) 학생들과 박정희 교사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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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적 판단 방법 배우는 ‘민주시민 교육’
모의재판 경연대회를 한 달 정도 준비하면서 사회 교과목에 대한 이해도 자연스레 높일 수 있었다. 에스피성화 팀을 지도한 유우진 교사는 “보통 학생들이 사회 단원 중에서도 법 단원을 어려워한다. 자발적으로 모의재판 경연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은 법조문에 대한 거부감이 확실히 덜하다”고 했다. “판례를 찾아가며 연구해보고, 재판정에 서서 갑론을박 변론을 펼쳐본 경험이 있는 거잖아요. 아이들이 ‘손해 보지 않으려고 법 공부한다’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다가도, 모의재판에 한번 참여해보면 ‘법을 배워 권리를 찾아나가자’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대구지법 윤민 판사는 “학생들이 모의재판 경연대회를 통해 ‘법치주의 사고’를 체득하고, 학교와 사회 속 다양한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며 “아무리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건·사고라도 법리적 해석을 통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방법론’을 경험해본다는 점에서 민주시민 교육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글·사진 김지윤 <함께하는 교육> 기자
kimjy13@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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