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이라는 말 자체가 모호하기도 하지만, 최소한 기존 제도권에서 일상화되어 있는 비교육적인 양태만은 지양하겠다는 다짐과 목표를 갖고 출발했다. 체벌을 하지 않는다, 학생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 학생들을 교육의 주체로 본다, 성적이라는 획일적인 척도를 버린다, 지식교육과 인성교육의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 자연친화적인 환경 속에서 작은 학교를 지향한다, 전인적 인격 함양을 위해 공동체적 생활과 다양한 체험학습을 실시한다, 교육 주체가 모두 참여하고 합의하여 운영한다, 어찌 보면 새로울 것 없으나 일그러진 우리 교육현실에서는 파격이었고 문제적이었다. 새로운 교육학적 관점을 정연하게 내세우고 있는 것도 아니고, 교수학습의 새로운 모형을 제시하거나 목표 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마땅히 그렇게 해 왔어야 하는 내용들이다. 대안이라기보다는 ‘정상적인 교육의 회복’에 불과한 수준이다. 전교조에서 이미 80년대에 제기했던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교육 회복’의 열망은 대단했다. 대안학교들이 다 궁벽한 시골에 자리잡고 있고 교육 시설을 포함하여 교육환경이 지극히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대안’을 원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줄을 이었다. 이 점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물리적 교육 환경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배우는, 사람들의 학교’가 목마른 이들을 적시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98년 대안학교들이 문을 처음 열 때는 교육계 내에서조차 그 구체적인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다. 대안학교에 대한 인식이 정확하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정상적이지 못한 아이들이 가는 정상적이지 못한 학교’로 매도되기 일쑤였고, 그런 인식 때문에 대안학교에 지원하려는 학생들은 원서 쓰기도 어려웠거니와 심지어는 이상한 아이와 학부모 취급을 받아야 하기도 했다. 새로운 것의 정착에는 진통이 따른다고 했던가? 대안학교가 때로는 우려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한때의 유행으로 폄하되기도 하고,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 구체적인 지적을 들어보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기도 한다. 공교육 전반의 개혁 없이 진행되는 교육 운동은 출발부터 한계를 드러내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옳고, 아무리 인성교육이 필요하다지만 지적 연마야말로 배움의 본령 아니냐는 말도 무시할 수 없고, 몇 가지 특별한 체험학습 노작학습보다, 정작 필요한 것은 학교를 경영하는 방식의 새로움과 대안이 필요하다 는 지적은 뼈아픈 것이다. 대안학교가 교육과정상 다양한 내용을 채우고 일반 학교와는 차별화를 시도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만도 충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 운영의 큰 틀에서는 많은 아쉬움을 보이고 있다. 상당수 학교는 종교 재단이 학교 법인을 움직이고 있는데, 외형상 안정감을 줄지언정, 교사 학생 학부모 지역민이 함께 학교를 만들어 간다는 관점에서는 아쉬움이 남고,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일부 대안학교의 경우 친족 경영이라는 사학의 병폐를 고스란히 답습하는 등 교사, 학부모, 학생들의 새로운 교육 열망을 심대히 훼손하거나 좌절시키고 있는 것을 볼 때, 학교의 공공성과 투명하고 민주적인 학교운영이야말로 대안교육과 대안학교가 현실에 안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학교법인에서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 있다면 공공의 약속이다. 대안학교는 ‘새로운 학교’가 되기 위해서 출발한 것이지, 전국에 수많은 학교가 있는데 그런 류의 학교를 몇 개 더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니다. 학교는 공공 기관이고 특히 사학은 설립 자체가 학교를 통한 자본의 사회 환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렇기에 기존 사학의 병폐를 극복하는 것부터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것을 제대로 실천한다면 대안학교의 경우, 교사, 학생, 학부모가 분명한 교육적 판단과 선택을 하고 해당학교에 발을 담고 있기 때문에, 대안적 교육활동의 실천은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형국이 될 것이다.
| 한겨레 필진네트워크 나의 글이 세상을 품는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