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나무
현삼이가 결혼을 했다. 현삼이는 내 제자다. 제자는 제자지만, 학교에서 가르쳐본 적은 한 번도 없는 제자다. 그래도 나는 다른 어떤 제자보다도 현삼이를 소중한 내 제자라고 생각한다. 내가 현삼이를 만난 것은 그 애가 고등학교 3학년 때다. 그때 나는 교사 문인들의 모임 ‘교육문예창작회’에 관여하고 있었는데, 그 단체에서 여름이면 청소년 문예교실을 열었다. 그해, 나는 그 교실 한 모둠의 담임이었다. 그리고 현삼이는 내 모둠의 학생이었다. 공동 창작에도 열심이었고, 종합 발표회 준비에도 열성적이었던 현삼이는 키는 작지만 마음은 한 없이 큰 친구였다. 심신의 ‘오직 하나뿐인 그대’를 열창할 때는 진지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상고에 다녔던 현삼이는 졸업 후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몇 해 뒤, 내게 찾아온 그 애가 불쑥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저 회사 그만 뒀어요. 배낭 메고 한동안 세상을 떠돌고 싶어요.” 그런 말을 남기고 그 애는 푼푼이 모은 돈을 다 털어 배낭여행을 떠났다. 어느 때는 네팔에서 엽서가 날아오기도 했고, 또 어느 때는 인도 소식을 담은 이야기를 전해 오기도 했다.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 애는 다시 취직을 했고, 대학에도 들어갔다. 세상을 떠돌며 배운 생생한 경험이 그 애의 삶에 큰 자양분이 되었을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외로움이 컸던 그 애에게 나는 아마도 부모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결혼식에 앞서 그 애는 내게 이런 부탁을 했다. “선생님, 저 결혼해요. 부산에서 하는데, 선생님께서 오셔서 축하의 말씀 한 마디 해 주세요.” 나는 그 애의 결혼식에 가서,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삶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을 살라는 당부의 말을 했다. 그 애가 살아온 삶의 곡절을 잘 아는 나로서는, 결혼 후의 삶이 의무보다는 즐거움이 되길 바라서였다. 결혼 뒤, 현삼이는 남편과 함께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지리산에서 조그만 농사를 지으며 약초 공부를 한다고 했다. 평소 산을 좋아해 주말이면 산에서 살다시피 하고, 산을 찾아 네팔을 떠돌기도 했던 그 아이에게, 지리산은 얼마나 잘 어울리는 삶터인가. 자신이 좋아하고 즐기는 일을 하며 살기에도 생은 짧다. 바쁜 일상에 쫓겨 살아가다가 나는 때때로 지리산으로 들어간 현삼이를 생각한다. 시간에 떼밀리지 않고 살아가는 그 아이의 삶이 내가 꿈꾸는 삶이기 때문이리라.최성수/서울 경동고 교사 borisog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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