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일하러 가는 사람들] ⑩ 영어회화 전문 강사
채용땐 ‘정년 보장’ 교육공무원법 준용 명시
교육청이 뽑아놓고 계약은 학교장과 하도록
1년씩 연장 최대 4번…신규채용 다시 거쳐
정년 아무 소용없는 ‘도로 1년차’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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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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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강사 1350명 고용, 4년 뒤 526명 해고
인권위, 불합리한 고용 개선 촉구했지만
교육청은 지난해 정규직 전환 대상에서 빼 그는 올해 5학년과 6학년의 영어수업을 맡았다. 8시30분에 출근해서 하루 일정을 점검한 뒤 9시10분부터 첫 교시를 시작한다. 4교시까지 수업하는 날이 나흘, 5교시까지 수업하는 날은 하루, 이렇게 일주일에 21시수를 맡는다. 한 단원을 마칠 때마다 간단하게 학생들을 평가한다. 평가는 수업과 연계한 과정 중심으로 진행한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나이스, NEIS)에 영어와 관련한 학생 기록을 기재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그는 동료 교사들처럼 수업권과 학생 평가권을 갖고 일을 한다. 점심 시간엔 다른 교사와 함께 학교 일과 세상 돌아가는 일을 놓고 가볍게 수다를 떤다. 수업을 마친 오후에는 주로 수업 준비에 시간을 쓰는데, 회의가 있거나 교사 연수가 준비돼 있으면 동료 교사와 함께 참석한다. 하지만 그는 교사가 아니다. 해마다 1년씩 계약을 연장하는 비정규직 강사다. 하지만 이마저도 최대 4년까지만 연장할 수 있다. 계약을 갱신하다가 4년이 지나면 퇴직금을 받는다. 계속 일을 하고 싶으면 다시 신규 채용 절차를 밟아야 한다. 시연씨는 초등학교에서 일하는 영어회화 전문 강사다. 올해로 9년째 같은 학교에서 일하고 있다. “영어회화 전문 강사라고 하는데, 10년 전 정부가 ‘영어공교육 완성 실천방안’을 추진하면서 시작된 자리예요. 이 정책으로 초등학교는 영어수업 시수를 늘렸어요. 중·고등학교는 수준별로 나눠서서 영어수업을 하게 됐는데, n+1이라고 두 개 반을 묶어서 수준에 따라 세 개 반으로 다시 쪼개어 진행해요. 그러니까 영어교사가 부족하게 된 거죠. 처음부터 교사의 역할로 뽑은 자리였어요.”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기부터 영어교육을 강조했다. ‘미국에서 오렌지라고 하니까 못 알아듣더라, ‘오륀지’라고 해야 알아듣더라’라는 당시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의 발언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인수위는 초·중·고에 ‘영어과목을 영어로’ 수업하는 전문 강사를 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2009년부터 4년간 2만3000명을 채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인수위는 이 정책을 추진하는 데 약 1조7000억원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했다. 강사 규모는 2009년 9월 1350명이었다가 2013년에는 6100명까지 늘어난다. 불안정한 고용 조건 탓에 2018년에는 2800명가량으로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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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 때 열린 영어캠프에서 아이들이 영어 퀴즈에 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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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교에서 열린 영어 페스티벌에서 아이들이 영어카드를 들고 놀이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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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약 땐 동료 교사가 면접관
방학 여름·겨울 더해도 총 20일
그래도 아이들과 보충수업 꾸린다
‘가르치는 사람’으로 대해주는 존재
학교 안에선 학생들밖에 없으니까 “우리가 임용시험도 안 보고 교사 시켜달라고 한다는 말도 있는데, 우리의 목적은 교원이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원하는 건 무기계약직이 되는 거예요. 저희는 교사 정원과 상관이 없어요. 플러스알파예요. 저희는 교원 외의 인력이기 때문에 그냥 더 있는 거예요. 저희가 있으면 그 학교 선생님들은 22시수 해야 하는 걸 20시수만 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인숙씨는 2009년 7월 시험을 치렀다. 1차 시험은 서류심사였다. 2차 시험은 교수 학습지도안을 작성하고 수업을 실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영어로 진행되는 심층면접이었다. 시험에 합격한 그는 자신이 계약직임을 알고 있었지만, 학교에서 일하니 내심 교사와 같은 처우를 기대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근로 계약을 체결하는 날부터 무너졌다. 교육청은 시험을 주관하고 자신을 선발했지만, 계약은 학교장과 맺으라고 했다. 초등학교는 학급담임제를 큰 틀로 삼아 운영된다. 그런데 고학년이 될수록 배울 것이 많아지니 고학년을 맡은 담임교사는 수업이 늘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고학년 담임교사는 1, 2학년 담임교사보다 업무 부담이 상대적으로 크다. 이걸 보완하기 위해 교과전담제가 시행됐다. 1991년부터다. 고학년 담임교사의 업무를 줄이고, 주요 교과목에 대한 전문성을 높이자는 취지였다. “초등학교는 보통 담임선생님하고 모든 과목을 공부하잖아요. 그런데 보통 3학년이 되면 교과전담 교사라고 해서 담임선생님이 아닌 다른 선생님을 학생이 만나게 돼요. 음악, 미술, 체육 같은 과목이나 영어를 교과전담 교사가 맡아요. 그러니까 영어를 전담하는 교사가 있는 거예요. 그럼 그분하고 저희하고는 하는 일이 같은 거죠.” 영어를 전담하는 교사는 2009년도 이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영어교육을 강조하면서 일이 늘었다. 일할 사람이 많이 필요했다. 영어교사만으로는 늘어난 시수를 감당할 수 없었다. 정부는 부랴부랴 일할 사람을 구했다. 제도 시행 첫해에는 초등학교 2급 정교사 이상 교원자격증 소지자, 중등학교 영어 2급 정교사 이상 교원자격증 소지자, 테솔(TESOL) 등 영어교육 과정의 석사학위 소지자, 영어 관련 학과 학사학위 이상 소지자 등을 응시자격으로 삼았다. 다음해 일할 사람이 더 많이 필요해지자 정부는 토익점수와 대학 학사학위만으로 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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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교에서 열린 영어 페스티벌에서 고학년 아이들이 자신들의 부스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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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교에서 열린 영어회화 강사의 공개수업을 여러 교사들이 참여해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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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출산했어요, 2월까지 휴직 가능하지만
재계약 들어가는 12월…눈치가 보이는 거예요
교사 시켜달라? 아뇨, 우리 바람은 무기계약직”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예전엔 영어를 전공한 사람들이 자존감이 높았어요. 프라이드가 높다고 하죠. 그런데 이 일을 하면서 내가 열등한 존재인가 싶을 때가 많았어요. 특히 4년마다 신규 채용절차를 밟을 땐 말할 수가 없어요. 처음 들어올 땐 교육청에서 시험을 봤지만, 4년이 지난 뒤 신규 채용 땐 각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해요. 어제까지 동료였던 교사가 오늘 심사위원으로, 면접관으로 제 앞에 앉아 있는 거예요. 제가 제출한 자기소개서를 동료 교사가 읽고 질문하고 그러는 거죠. 발가벗겨지는 느낌이에요.” 박가영(가명)씨는 올해 해고를 당했다. 2009년 3월부터 2014년 2월까지 4년을 근무하고, 신규 채용절차를 다시 밟았다. 여느 때처럼 1년마다 계약을 갱신했다. 2014년부터 2018년 2월까지 다시 4년을 근무하고 또다시 신규채용 절차를 밟아야 했다. 이때 그는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함께 일한 동료와 관리자가 그를 학교에서 더는 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저 여러 지원자 중 다른 사람을 채용했을 뿐이라고 여길 것이지만, 가영씨는 일자리를 잃었다. 그는 부당해고에 맞서 소송을 진행 중이다. 영어회화 전문 강사는 방학이 되면 영어캠프를 맡는다. 캠프 운영기간은 학교마다 다르다. 짧게는 3일간, 길게는 3주간까지 진행한다. 이들의 방학 기간은 여름과 겨울을 합쳐 총 20일이다. 이 외 기간에는 학교에 나와야 한다. 쉬려면 연가를 써야 한다. 방학 직전 학교 교사들은 방중 근무계획서를 작성하고, 이것을 취합해 공지를 띄운다. 영어회화 전문 강사라는 직종에 대해 잘 모르는 교사는 방중에 왜 이렇게 근무를 많이 하냐며 묻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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