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년 뒤 어떤 직업이 뜰까는
중요하지 않은 질문
그때 가서 필요한 지식
기꺼이 배우겠다는 태도가 중요
창의성은 꼭 몰입해야 나타난다?
“멍 때릴 때 발현될 수도 있다”
다른 생각, 다른 경험 가진
사람들과의 ‘협업’이 중요해
정재승 교수, AI 시대 교육 방향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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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25일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가 경기도 고양교육지원청이 마련한 토론회에서 학생과 학부모 200여명에게 ‘고양문화예술교육의 방향성을 묻다’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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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에 시키면 웬만한 일은 다 하는 시대에 왜 학교는 우리를 자꾸 인공지능 수준으로 머릿속에 똑같은 것만 넣으려고 하는지, 인공지능에 우리 뇌를 넣어도 시원찮을 판에 왜 인공지능 대하듯 우리 뇌를 인공지능화하는지, 이것이야말로 현실적으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적인 과학 글쓰기로 유명한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가 지난해 7월 펴낸 책 <열두 발자국>에 나오는 말이다. 미래에는 상당수의 직업이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자 많은 학부모들은 “대체 우리 아이는 어떤 직업을 택해야 할까?” 하고 고민한다.
한데 정 교수의 답변은 ‘쿨’하다.
“우리는 10년, 20년 뒤를 예측하기 힘들다. 앞으로는 기술 발달 속도가 너무 빨라 세상이 뒤집어진다. 10년 뒤에 이런 직업이 뜰 거라는 예상은 틀릴 가능성이 크다. (기술 발달이 가속화돼) 지식의 반감기는 갈수록 짧아진다. 20년 뒤 어떤 지식이 필요하다면, 그때 기꺼이 배우고 새로 시작할 마음이 있는 사람, 무엇이든 배우려는 태도와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 10~20년 뒤 어떤 직업이 뜰까는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다.”
정 교수는 지난 1월25일 경기도 고양교육지원청 3층 강당에서 열린 ‘고양문화예술교육의 방향성을 묻다’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강연이 유명 인사를 초청해 얘기 한번 듣고는 끝나지만 이번 정책토론회는 달랐다. 이 행사는 고양교육지원청이 인공지능 시대 교육정책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지난해 12월26일부터 올해 1월25일 한달간 세차례에 걸쳐 마련했는데, 초중고생과 학부모 200여명이 참여했다. 1차로는 ‘2019년 문화예술로 뭐든지 해보자’라는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열어 학생들이 제안한 내용을 학부모와 교사들이 경청했고, 2차에서는 <열두 발자국>을 읽으면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문화예술교육을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마지막 토론회에서는 <열두 발자국>의 저자 정재승 교수가 참여해 교육정책의 방향성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정 교수는 강연에서 자신의 전문 분야인 뇌과학과 함께 우리나라 교육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다.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 직업 선택과 관련해선 의미 있는 제안을 했다.
“미래에 필요한 것은 그때 가서 배우면 된다. 10년 뒤 상황이 어떻게 바뀌든 그 시대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찾아낼 수 있는 사고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미래에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식을 미리 머릿속에 집어넣는 데 급급해서는 안 된다.”(이하 정 교수 발언 내용은 이날 강연과 그 이후 이뤄진 전화 인터뷰 내용을 합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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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집착 교육 시스템이 문제
그는 현재 한국 교육 시스템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했다. 똑같은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실수하지 않고 토해내면 100점, 하나 틀리면 95점 이런 식이라는 거다. 대학을 서열화하고 그들 사이에 짝짓기만 한다. 대학에서 학생들은 스펙만 쌓으려고 한다. 스펙과 경험이 비슷하므로 더 많아 보이게 하려면 스펙을 하나라도 더 쌓아야 하는 악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아주 불행한 교육 시스템이다. 지식을 머릿속에 정확하게 집어넣는 일은 대단한 게 아니다”라며 “인터넷을 검색하면 정보가 다 나오는 시대에는 나만의 관점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창의성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똑같은 사물과 사건, 현상을 보고도 남다른 아이디어를 내려면 창의성이 핵심이다. 창의성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멍 때릴 때 창의성이 나타난다.”(웃음)
정확하게 말하면 항상 몰입만 하지 말고 멍 때릴 때도 필요하며 이때 의외로 창의성이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몰입할 때에만 창의성이 나온다고 봤다. 그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 뚜렷한 목적성이 없을 때 창의성이 발현되기도 한다”며 “주말에 소파에서 뒹굴뒹굴하면 혼나겠지만 이게 창의성이 발현되는 과정일 수도 있다.”(웃음)
우리는 보통 창의성이 뛰어난 사람이나 천재는 홀로 고립돼 생활하면서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린다고 본다. 즉 ‘천재는 고독하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창의성이 드러나려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거나 서로 다른 경험을 한 사람들이 모여서 지적인 대화와 토론을 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제품을 만들어보는 협업 경험을 어린 시절부터 여러 번 하는 게 중요하다.”
즉 창의성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창의성 발현에는 아주 집중했다가 완전히 이완했다가 하는 게 필요하고… 혼자서 몰입하는 ‘밀실에서의 사고’와 함께 토론하는 ‘광장에서의 사고’ 둘 다 필요하다.”
실제 2015년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창의성과 협업을 강조하고 객관식 평가나 암기식·주입식 교육을 지양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라도 기본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기본지식은 암기해야 한다”며 “학생의 자율성만 강조하다 보면 기본지식 습득을 소홀히 해 기초학력 저하가 나타날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창의적 사고를 위해 기본개념과 지식을 배워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면서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우리 교육은 기본적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는지 아닌지만 평가한다. 5번째, 6번째 답안을 만들 기회가 없다. 이런 식으로 평가하면서 창의적 교육을 위해 기본지식을 넣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변명이요 주객전도다. 창의성을 위해 기본지식을 습득해야 하는 거지 기본지식으로만 한 줄 세우기 평가를 하다 보면 창의성은 길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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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 창의성이 열쇠
학생과 학부모들은 3차에 걸쳐 진행된 교육정책토론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초등학교 5학년 아들과 함께 <열두 발자국>을 읽었다. 모르는 내용이 나오면 함께 찾아보면서 아들과 소통의 계기를 만들었다. 부모가 자신이 공부했던 방식을 아이에게 강요할 경우 (아이의 성장에) 도움도 주지만 방해를 하기도 하는 것 같다. 아이와 함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교육에 중요하다고 본다.”(한뫼초 학부모 최제이콥씨)
“나는 원래 과학과 수학에 관심이 없었는데 <열두 발자국>은 너무나 재미있어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버스에서도 읽고 걸어가면서도 읽어 400쪽을 하루 만에 다 읽었다. 책 읽고 교수님 강의를 들은 뒤 과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무원초 6학년 장규리)
“책을 읽고 강연을 듣고 나서 인간의 뇌는 단순하게 명령을 내리거나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요즘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할 때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좋다니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잘못이다. 또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른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가람초 6학년 원형석)
“나는 베이스트롬본을 연주한다. 음악가로 진로를 잡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멍 때릴 때 창의적인 생각이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창의성은 엄청나게 집중해야만 나오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신일중 3학년 정재웅)
“1차 연수 때 정책토론회를 했다. 우리 모둠은 나 말고는 초등학교 5~6학년이었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 토론이 잘 안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되레 다른 분야, 다른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모여서 토론하고 행동했을 때 창의성이 폭발한다는 것을 실감했다.”(덕이고 1학년 탁경민)
김태경 기자
ktk7000@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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