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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한 모든 차별 뒤에는 경제 착취가 있다
힘이 더 센 인종은 인종이 다르다는 구실을 내세워 약한 인종을 지배한다. 지배 인종은 힘이 약한 인종에 대해 머리가 나쁘고 비도덕적이라고 선전한다. 경제 착취는 지배받는 지역 또는 집단에 대한 부정적인 이데올로기 없이 불가능하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높게 평가하면서 상대방을 착취하고 지배할 수 없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차별(아파르트헤이트)이 대표적인 예다. 이 나라의 흑인종은 도시에 들어와 사는 것이 엄격히 제한되어 왔다. 7할이나 되는 흑인들은 비옥하지 못한 좁은 땅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사랑하는 흑인과 백인이 결혼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이와 같은 차별에 저항하여 수많은 흑인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다 감옥에 들어가고, 고문 받고, 죽어갔다. 일부 양심적인 백인도 이에 동조하였다. ‘자유의 절규’, ‘사라피나’등 이를 소재로 다룬 영화도 많다. 다행히 1994년에는 흑인들에게도 처음으로 투표권이 주어지면서 흑인들이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인종이 같은 경우에는 인종 차별을 할 수 없으므로 민족차별을 통해 다른 민족을 착취한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심으로 유태인을 비롯한 다른 민족보다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주장한 것이 그 좋은 예다. 유태인은 불행하게도 히틀러 치하에서 수난을 겪었다. 인류는 인간의 존엄과 신성을 모독한 이 부끄러운 재앙을 통해 다시는 인류의 역사에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워야한다.
이스라엘 그리고 팔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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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직도 이와 비슷한 일이 세계 여기저기서 반복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역설적으로 유태인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 유태인의 이스라엘과 아랍 족인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이 그것이다.
중동 문제는 뿌리는 유태인들이 성서의 2000년 전 기록을 근거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1948년 이곳에 이스라엘을 건국한데서 시작된다. 이 지역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2세기에 로마에 의해 쫓겨난 뒤, 십자군 원정 기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기간 동안 아랍 인들은 이 땅의 주인공으로 살아 왔다.
제 1차 세계 대전 중 독일과 싸우던 영국은 유럽과 미국의 돈 많은 유태인들의 지원을 얻기 위해 1917년 발포어 선언을 발표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태인 국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래부터 팔레스타인에 아무런 권한도 갖고 있지 않던 영국은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팔레스타인을 위임 통치령으로 편입시켰다. 그 후, 유태인들은 이주를 시작해 1918년에 6만 명이 안 되었던 유태인은 1947년, 총인구 193만 명 가운데 61만 명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유태인들이 가진 땅은 전체의 6%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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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웨스트뱅크;요르단강 서안) 일부 지역이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치지구이다. ⓒ네이버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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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을 의결했다. 이 지역을 아랍 국가와 유태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은 국제 도시화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전체 면적의 56%를 유태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엔은 이 지역의 올리브 농장과 곡창지대의 80%, 아랍 인 공장의 40%를 유태인에게 배정했다.
흔히 유태인의 경지는 불모의 사막을 개척할 것으로 알고 있으나, 처음에 그들은 강대국의 힘을 빌려 팔레스타인의 농장을 빼앗았던 것이다.
팔레스타인들과 다른 아랍 인들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위협적인 서구 문명의 전진 기지로 규정, 유태인이 이스라엘 국가를 선포한 다음 날 공격을 개시했다. 제1차 중동 전쟁이 된 이 전쟁을 아랍은 팔레스타인 전쟁이라 불렀고, 이스라엘은 독립 전쟁이라고 불렀다. 당시 아랍과 이스라엘 젊은이가 서로 사랑을 했지만 두 민족이 적대 관계로 변하여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소재로 한 영화도 있다.
그 후, 네 차례에 걸친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미국 등 사방의 원조에 힘입어 승리를 거듭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다른 아랍 국가의 영토까지 점령했다. 아직도 이스라엘은 자신의 영토 밖으로 많은 아랍 땅을 점령해 오고 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 반환에 강경히 반발하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일부 매파는 점령지를 이스라엘로 병합하자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점령 지역에 동유럽과 소련의 유태인을 정착시켜 사람 수로 팔레스타인을 압박하는 방식을 강행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점령지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하면 이스라엘 군인들은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는다. 여기에는 객관적인 법이 없다. 시위대에 플라스틱 총알을 쏘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모든 팔레스타인 젊은 남자들을 이 지역 밖으로 몰아 내어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눈물로 항구가 눈물 바다를 이룬 적도 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국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시각은 미국 정부의 대이스라엘 정책보다도 더 긍정적인 것 같다. 이스라엘과 아랍의 싸움은 처음부터 끝까지 땅 싸움인데, 우리가 이들의 대립을 단순하게 민족적, 종교적 차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기독교와 관련하여 이스라엘에 더 호의적이 아닌가 싶다.
같은 인종이지만 다른 민족을 지배하기 위해 민족 차별을 강조하는 예는 많다. 일본인이 한국인을 열등하게 보고 멸시하는 것도 이와 같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를 통해 한국의 오랜 역사와 문화와 전통을 말살하려 했다. 심지어는 창씨개명을 하고, 언어를 없애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문화 정책은 한국의 각종 자원을 수탈하고, 나아가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른 모순을 일시적이나마 해소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은 영국 등 자본주의가 먼저 발달한 나라들이 겪은 것처럼 원료의 공급과 제품의 판매 시장을 찾아야 하였다. 그리고 심각해져 가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을 줄이기 위해서도 다른 나라로 등을 돌려야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라는 공장은 가동을 중단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있었다.
이런 사회적 갈등을 감추고, 국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지배적인 집단, 즉 자본가와 국가 권력 잡단은 인종 차별 의식이나 민족 감정이나 지역감정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동물적인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을 쓴다. 1920년대 일본 관동 대지진 때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일본 사람들의 일본 정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는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거짓 선전을 통해 일본인의 불안 심리를 해소하였다. 이때, 우물에 던져져 죽은 한국 사람들의 유해가 지금도 발굴되고 있다.
인도가 세 나라로 나뉜 이유가 종교문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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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과 민족과 종교의 차이를 표면에 내세우나 그 뒤에는 경제 착취가 있는 대표적인 예는 인도 반도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한때 영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이 세계 최강이었다.
이 나라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가졌다. 그 중의 하나가 인도였다. 인도 사람들은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하려고 노력했다. 영국은 인도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민족 간의 갈등을 조장했다 인도인을 스리랑카(실론)에 이주시켜 영국 대신 통치를 위임하였다. 영국은 이런 분할 통치 방법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도 적용하였다. 인도인은 계절풍을 따라 남아프리카까지 이주하여 백인 다음의 계급으로서 흑인을 지배하였다. 지배받는 민족 또는 인종은 저 뒤에 있는 제국주의 국가보다 바로 맞부딪치고 있는 하수인과 싸우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 있던 인도 반도는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종교의 차이에 따라 세 나라로 나뉘었다. 그런데 이들이 분리된 이유는 종교의 차이가 근본 원인이었을까? 같은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함으로써 다시 둘로 분리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경제적 차이가 깔려 있다. 갈라지기 전, 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에서 거둔 세금을 서파키스탄에 투자하여 서파키스탄을 개발하였다. 이에 동파키스탄이 반발하여 전쟁이 벌어졌으나, 결국 독립할 수 있었다. 이것은 종교가 다르다고 반드시 적대적인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종교가 같다고 반드시 공동체 의식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
민족이 같은데도 좁은 나라에서 지역감정이 심한 경우는 우리 한국을 들 수 있다. 망국병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역감정이 심한데, 이것은 근래 대통령 등 각종 선거에서 상징적으로 잘 나타난다. 민주 사회라면 인종, 민족, 종교, 성별, 지역에 따른 일체의 차별이 없는 사회를 지향할 것이다. 그러나 비민주적인 사회는 가진 자들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조건 자기만 지지하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때 국가 조직과 국토 자원은 국민이 아니라 군대 같은 일부 집단, 일부 계층, 일부 지역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게 된다. 가진 자들은 지역 감정과 편견을 확대하기 위해 공작정치와 언론 조작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감정적으로 어떤 지역을 매도하거나 높게 평가하면 지역 간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질 뿐이고, 이것은 독재 정권이 바라는 바 민주주의 실현을 더욱 어렵게 한다. 지역 간의 사회 경제적 차별을 줄임으로써 비로소 배타적인 지역감정이 사라질 수 있다.
국제연합(UN)의 한 기구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백 간 인종 차별을 줄이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이를 주제로 한 미술 전시회를 가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전시회가 열렸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일부 작품의 전시를 거부하였다. 국제연합은 이에 대해 항의하였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인종 차별과 지역 차별을 비롯한 모든 사회적 차별은 뿌리가 하나임을 암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사회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는 인종 차별, 인족 차별, 종교 차별, 지역 차별이 약화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 그 예는 소련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소련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줄인 말이다. 노동자, 농민 등 재산이 없는 사람들의 합의체인 소비에트 중심으로 15개 공화국이 연방 공화국을 세웠다. 소련이 붕괴되기 전에는 인종과 민족 사이에 차별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자원과 산업의 차이가 심했다. 그래서 자원이 풍부하고 산업이 발달한 지역은 독립하기를 원했다. 다른 후진 지역으로 나가는 많은 자원과 생산물을 자기들이 독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우크라이나가 그러했다. 우크라이나는 넓은 구조 평야가 비옥한 흑토지대로 이루어져 있어 세계적 곡창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 세계적으로 석탄과 철광석이 많이 나 드네프르 콤비나트라는 대공업 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중국 북동부에 있는 우리 동포들은 고유의 언어와 전통을 계속 이어 오고 있으나, 일본의 재일 동포들은 그렇지 않다. 조총련계에 비해 민단계에 속하는 일본의 많은 교포들은 한국인임을 감추고 산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이와 같은 차별은 각 나라의 경제 제도의 차이에서 나온다.
이처럼 지구상의 대부분의 분쟁은 그 뿌리를 보면 크든 작든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유리하거나 부당하게 착취하려는 쪽에서 양보해야 분쟁이 해결될 것이다. 각 집단의 지도자달이 인종, 민족, 종교, 지역사이의 편견을 조장하여 싸우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피해를 가져다준다. 지역 사회가 편견에 빠지면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대신 전쟁을 통해 생명을 잃을 수 있고, 분노의 화신이나 광신자가 되어 주어진 상황과 세계에 대해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 도서출반 사계절 '교실밖 지리여행'
저자 - 노웅희, 박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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