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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13 18:19 수정 : 2005.02.13 18:19

“거창학살에 가려진 705명 죽음
이제 명예회복·보상절차 밟아야”

중공군 개입 뒤 1·4 후퇴 시기인 1951년 2월7일은 음력 정월 초이튿날이었다. 이날 지리산 동쪽 큰산들 사이, 해 뜨고 지는 것으로 시간을 아는 두메 가현·방곡·점촌(산청 금서면)과 서주리(함양 휴천면) 네 마을 ‘양민’ 705명(어린이·여성·노인 85%)이 느닷없이 떼죽음을 당하고 세 마을 133가구가 잿더미가 된다.

그때 8살로서 화계마을에 살다 경호강 건너 서주리로 끌려갔던 강희근 교수(경상대·국문학)가 최근 ‘산청·함양사건 양민희생자 유족회’(회장 정재원)와 함께 사건 전모, 명예회복 운동 전말과 자료를 바탕으로 지은 〈산청·함양사건의 전말과 명예회복〉을 내놨다. 이로써 ‘떼학살’의 진상이 생존·관계자들의 말, 군 작전일지, 거창사건과의 관계, 재판·언론 기록, 유족회 활동과 명예회복 입법 과정이 어울려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이 사건은 남원·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11사단(사단장 최덕신)의 9연대(연대장 오익경 중령)에 내린 ‘보11사 작명5호’란 명령을 3대대(대대장 한동석 대위) 중심로 7일부터 11일 사이에 수행한 학살작전입니다. 7일 아침부터 오후까지 가현(123명) 방곡(210명) 점촌(62명) 서주리(310명) 주민 학살이 두 나절 만에 끝났고, 9일부터 11일 사이의 거창 신원면 작전(719명)으로 이어져 닷새 만에 마무리됩니다.”

-한 작전 아래 한 부대가 저지른 일인데, 거창사건만 두드러진 까닭은?

“당시 거창의 신중목 의원이 국회 차원의 조사발의를 한 데 반해 산청 쪽 이병홍 의원은 병중이어서 발의 단계에서 빠지게 된데다, 생존자·유족들이 극소수였고, 진상을 거론할 분위기도 아니었던 탓입니다. ‘거창사건’으로 축소·은폐되는데, 그조차 숨기려고 국회조사단의 조사를 방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지요. 같은해 7월 대구 고등군법회의 심문에서 산청·함양 학살도 잠깐 거론되나 정치적 재판으로 끝납니다. 4·19 뒤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있었지만 5·16으로 주저앉았고, 90년대 들어서야 본격적인 신원운동이 벌어지지요. 53년 방곡지구 유족 몇몇이 ‘동심계’를 무어 곡우 때 숨어 제사를 지내다 89년에야 유족회가 섰을 정돕니다.”

-학살 작전을 벌인 연유는?

“‘작명 5호’를 비롯한 여럿이 있습니다. 최덕신 11사단장의 ‘지킬 것은 견고히 지키고 나머지는 쓸어버린다’는 ‘견벽청야’ 전술, 제주 4·3사태 진압군이었던 9연대의 어긋난 자부심, 지휘관과 전쟁 자체의 부도덕성이 얽힌 것입니다. 양민을 통비분자로 몰아죽여야 할 만큼 전세가 다급하고 전과가 부실했던 탓도 있지요.”


-여남은 숙제와 바람은?

“유족들은 2004년 3월 국회를 통과하고 바로 정부에서 거부해 폐기됐던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조치법’의 부활을 주장합니다. 타당성을 인정받아 입법한 법률을 고건 대통령권한대행 때 거부한 겁니다. ‘광주사건 보상 개정법률’, ‘민주화 운동 개정 특별법’ 등은 같이 통과돼 보상 절차를 밟고 있지요. 2·7 학살 54돌이 지났습니다. 유족들은 단지 ‘나라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다른 민간인 학살 과거사 규명에 이 작업이 보탬이 됐으면 합니다.

최인호 기자 golja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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