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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할머니들에 ‘변호사 아들’ 최봉태(43) 사무국장은 이미 지난달 각종 언론을 통해 한바탕 집중 조명을 받았다. 지난달 17일 공개된 한-일 협정 주요 외교문서 5권의 공개를 이끌어낸 정보공개소송의 담당 변호사였기 때문이다. 최 국장은 이에 앞서 지난 2000년 5월1일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에 끌려갔다가 피폭된 한국인 6명이 이 회사를 상대로 부산지방법원에 낸 손해배상 소송을 맡았다. 이어 소송 과정에서 외교통상부에 한-일 협정 문서를 공개해달라고 요청했다. 외교부가 이를 거부하자 서울 행정법원을 상대로 정보공개 소송을 내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고 정부가 관련 문서를 공개하게 된 것이다. 그가 일제강점 피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 1994~1997년까지 일본 유학이 계기가 됐다. 애초 그의 일본행은 노동문제에 관심이 있어 노동법을 전공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선 일제에 동원된 전쟁피해자들이 소송을 본격적으로 제기할 때였다. 그들의 소송을 지켜보며 일제 전쟁 피해는 단순히 과거 문제가 아니라 전쟁 피해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 반드시 풀고가야 할 역사적 과제라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고 한다. 그는 1998년부터 일제 전쟁 피해 진상을 파악하고, 피해자들의 아픔을 달래는 작업에 직접 뛰어들었다. 사비를 털어 일본을 오가며 일본 시민단체와 손잡고 전후 보상문제 해결에 앞장서 왔다. 위안부 할머니 등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국내 관련 소송에 무료로 변론을 도맡았고, 일본에서 진행중인 재판에도 참여했다. 대구에 법무법인 삼일종합법률사무소를 설립해 변호사로 활동해오면서 96년엔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과 함께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을 꾸렸다. 이를 이끌며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생일까지 일일이 챙기며 할머니들에게는 ‘아들같은 변호사’로 통한다.
“해방 60년 맞았지만…해방은 아직 안왔다”
지난 1일부터 서울 신문로 세안빌딩 8층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에 한 맺힌 과거사를 밝히려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일제 때 징용·징집 등 강제동원 피해를 신고하는 이들의 주름진 얼굴과 손에 쥔 빛바랜 사진속에는 이들의 풀지 못한 60년의 고통들이 서리서리 맺혀있다. 세월은 이들을 백발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로 만들어 버렸지만, 이들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아프고 서러운 기억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일제강제동원진상규명위의 실무를 이끄는 최봉태 사무국장을 지난달 28일 신문로 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최 사무국장은 “일제의 강제동원 진실규명은 처벌을 위한 것이 아닌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일본에 흩어진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유골을 송환받기 위해 “남·북이 손을 잡고 함께 실태파악에 나서는 방안도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힘없이 끌려간 사람들 인권 되찾아 줘야
증언자들 자꾸 세상떠나 시간과의 싸움
남북 힘합쳐 유골조사·봉환 요구도 고려 최 국장은 이 일을 해오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로 지난 2003년 8월 위안부 할머니들이 유엔에 ‘한국국적 포기서’를 낸 일을 꼽았다. 그는 “일제의 강탈로부터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정부가 해방 뒤 60년이 지나도록 진실조차 밝혀주지 않은 것은 큰 부끄러움”이라고 밝혔다. 최 국장은 지난 2001년부터 ‘강제동원 진상규명 특별법제정 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왔다. 그는 추진위 집행위원장으로서 지난해 2월 국회에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특별법’이 재석의원 175명 가운데 169명의 찬성으로 통과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일제강제동원 진상규명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해방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되는 피해를 본 사람들의 숫자조차 정확히 모르고 있습니다. 학자마다 연구소마다 8만명에서 800만명까지 각기 다른 수치를 내놓고 있습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일제 강점기 때 피해상황이 어떠했냐고 물어본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위원회는 피해자들의 신고와 조사를 통해 자료를 수집한 뒤 이를 바탕으로 진실을 재구성하는 데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일부에선 과거사 들춰내기라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일제 위안부 할머니들은 지난 13년 동안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요구는 누구를 처벌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위원회의 존재 이유도 진실규명, 그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닙니다.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도 진실을 밝히는 게 중요합니다. 일본인들도 역사의 진실을 알게 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반성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인들도 이런 고통을 절대 남에게 주어서도 안 된다는 교훈을 배울 것입니다. -특별법을 이끌어내고 위원회를 꾸리는 데 쉽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특별법이 지난해 2월13일 국회에서 통과될 때까지 3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웠을 때는 지난 2003년 8월 위안부 할머니들이 유엔에 ‘한국국적 포기서’를 냈을 때였습니다. 할머니들이 왜 국적포기서까지 냈겠습니까. 일제의 강탈로부터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정부가 해방 뒤 60년이 지나도록 일본의 사과도 받지 못하고 진실조차 밝히지 못한 것은 정말 부끄러워 해야 할 일입니다. 할머니들에게 한 번도 따뜻하고 고마운 조국이라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국민들의 무관심도 안타까웠습니다. 대한민국 정치인들이 이 특별법에 모두 반대한 것은 아니지만, 특별법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나서는 국회의원들도 거의 없었습니다. -일제강제동원진상규명위와 친일진상규명위원회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일제강제동원진상규명위는 일제로부터 강제 동원된 사람들의 피해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친일진상규명위는 친일 부역 행위을 밝히는 데 집중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같이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 잡음으로써 미래를 지향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일제 강제동원 진상규명위는 힘이 없어서 끌려간 사람들의 인권을 되찾아주는 데 좀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오는 6월말까지 피해 신고를 접수합니다. 규모는 얼마나 될 것으로 보십니까? =현재 위원회가 추산하는 피해인력은 노무 732만6585명, 병력 61만4516명 등 794만1101명입니다. 하지만 이번 신고가 직접적으로 보상과 연결된 것이 아니고 시간도 많이 흘러 자료가 없거나 증언할 사람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신고 인원은 현재 위원회 추산보다 훨씬 적을 겁니다. -피해신고 대상 시기가 일제에 의해 국권이 빼앗긴 1910년이 아니라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1년부터인데 이유는 무엇입니까? =군 위안부 문제와 관계가 있습니다. 일제는 만주사변 뒤부터 위안부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국권강탈 때부터 시작하는 게 맞지만, 우선은 강제동원이 뚜렷이 나타나는 그 때를 기점으로 했습니다. 일단 만주사변 때부터의 피해를 확인한 뒤, 나머지 시기는 뒤에 법을 개정해 추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을 증명할 자료나 사람이 부족해 진실규명 작업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정부가 지난 1971년부터 1993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일본에서 건네받은 ‘일제강점동원자 명부’에 이름이 있는 인원은 48만693명입니다. 정부가 피해자를 처음 조사한 1957년엔 28만명이었습니다. 물론 서류에 있는 이름은 중복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자료 부족 때문에 진실 규명을 위해 일본 정부의 협조가 필수적입니다.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이 가진 강제동원자 명부 등의 자료를 충분히 받아내야 정확한 사실 규명이 가능할 겁니다. 한국 정부가 이런 자료를 받아내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기 바랍니다. -앞으로 위원회는 어떤 쪽에 중점을 두게 됩니까? =일본 전역에 흩어져 묻힌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유골을 찾아서 모셔오는 문제입니다. 일본 정부는 북한과 수교 협상을 하면서 북한에 묻힌 일본인 유골 몇 구를 찾아오는 데 정성을 다합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일제에 의한 한국인 피해자들의 유골이 일본에 얼마나, 어디에 있는 지조차 모르는 실정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지난해 12월 일본 규슈 가고시마에서 정상회담을 벌이면서 유골반환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구체적인 진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는 ‘한·일 우호의 해’입니다. 8월15일을 즈음해 한국과 일본에선 여러 가지 행사가 열립니다. 이런 행사도 좋지만 8·15 전에 한국과 일본이 인도적인 차원에서 일본에 묻힌 한국인 유골 조사와 봉환을 논의했으면 좋겠습니다. -일본에 흩어진 한국인 피해자 유골은 얼마쯤으로 추산합니까? =일본에 묻힌 한국인 유골과 관련해 구체적인 자료가 전무합니다. 유골이 국내로 돌아온 것은 10%도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숨진 이들은 20~90만명으로 추산됩니다. -북한과 함께 이 문제를 일본에 요구할 수는 없습니까? =남·북이 힘을 합쳐 유골 조사와 봉환을 요구하면 일본 정부를 더욱 압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북한 출신자 가운데 일본에 묻힌 이들의 실태파악을 함께 요구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통일부 등 관계 부처와 협의해 북한과 함께 과거사 문제를 풀 구체적 방안을 마련할 계획입니다. -의문사위는 한국 정부 기관으로부터도 협조를 받지 못해 진실 규명에 차질을 빚었습니다. 그런 점을 보면 다른 나라 정부인 일본과는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또 이 작업은 시간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과거를 증언해 줄 사람들이 자꾸 돌아가시기 때문입니다. 올해만 해도 위안부 할머니가 여럿 돌아가셨습니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가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고 전향적인 자세로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일본은 원폭 피해를 당한 자국 국민들에게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원폭 피해자 가운데 강제동원된 한국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동시에 이런 이들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정부 역시 적극적인 자세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분명히 보여야 합니다. -보상 문제에 관해 얘기들이 많습니다. =일단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가운데 누가 보상의 주체가 될 것인지에 대해 이른 시일 안에 정리해야 합니다. 또 일본이 보상한다면 일본 정부가 할 것인지, 아니면 일본 기업들이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상규명과 함께 일본의 진정한 사과가 필요합니다. 물론 보상 여부와 관계없이 이 위원회의 진실규명 작업은 계속됩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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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뒤안길
자의반 타의반…“독립운동 하는 마음”
최봉태 사무국장과의 인터뷰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말로 시작해 ‘진실 규명은 계속된다’는 말로 끝났다. ‘진실 규명’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톤이 높아지는 그의 목소리에서 일제강점 피해에 대한 끓어오르는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최 국장은 2시간 가까운 인터뷰 중간쯤 “우리나라는 해방 60년을 맞았지만 아직 식민지 민중들의 해방은 오지 않았다”며 “독립 운동한다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잠깐 인터뷰가 끊겼다. 그의 말은 어떤 의미일까?
그가 먼저 입을 뗐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아직까지 해방감을 못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과거의 짐과 굴레를 아직 떨쳐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 한이 풀려야 진정한 해방이 온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독립군의 마음으로 피해자들의 한을 풀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최 국장은 위원회 활동이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했다. 증인이 돼 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자꾸 돌아가시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서만 위안부로 피해를 당한 김상희 할머니와 김분선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피해자들이 살아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선 시간과도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이 된 것은 ‘자의반 타의반’이라고 말했다. 하고 싶기도 했지만, 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맡게 된 측면도 있다고 했다.
지금 그의 직급은 별정직 3급 상당이다. 넌지시 변호사 및 사무국장 연봉을 물어봤더니 “빨리 이 작업이 끝나야 아내한테 사랑받을 것 같다”고 웃어넘겼다. 정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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