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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18 18:31 수정 : 2005.02.18 18:31

박정희 시절 공작정치를 진두지휘했던 중앙정보부의 김형욱 부장(왼쪽·4대)과 이후락 부장(6대).



김재규 지시로 공작 벌인듯

그동안 거의 진상이 드러나지 않았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 사건이 조금씩 베일을 벗고 있다.

18일 국정원 전 고위관계자의 증언 등을 종합하면, 김형욱은 1979년 김재규 당시 중정 부장의 지시로 중정 요원 8명이 공작을 벌여 한국인 유학생의 유인으로 마피아에 넘겨져 살해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납치사건 때 납치 현장에서 당시 중정 일본 책임자였던 김동운 서기관의 지문이 채취돼 중정의 개입사실이 드러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일이 있어, 중정이 직접 살해하기보다 마피아의 손을 빌었다는 것이다.

김형욱이 파리에 간 동기에 대해서는 회고록과 관련해 중정과 협상하면서 못받은 돈을 받으러 갔다는 설도 있으나, 김형욱 회고록을 쓴 김경재 전 의원은 지난 92년 한 여성잡지에 “김형욱이 실종 직전 한국 출신 연예인이 보낸 ‘러브레터’성 편지를 보여준 적이 있다”며 “이 연예인을 만나기 위해 파리로 갔을 것으로 본다”고 추측한 바 있다. 당시 김 전 의원이 “누가 대신 써준 것”이라고 했더니, 김형욱이 “아니야, 그래도 자기 나름의 진실을 담았을 거야”라며 상당한 신뢰를 보이더라는 것이다.

김형욱이 당시 신변의 위협을 느껴 항상 데리고 다니던 경호원도 없이 단신으로 파리로 간 것도 이런 추측을 낳고 있다.

이와 관련해 <월간조선>은 김형욱을 유인했다는 한국 유학생과 편지를 보낸 연예인이 다른 인물인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김경재 전 의원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연예인을 90년대에 만났더니 자신도 정보기관에 이용당했다며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고 말한 바 있어 동일 인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이에 대해 이 연예인은 전화통화에서 “김형욱이 중정 부장을 지낸 사람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고 전화통화한 적도 없으며, 편지 얘기는 처음 듣는 얘기”라며 “당시 파리 유학생들과도 전혀 교분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특별취재반




'팽'당한 뒤 박정권 치부 폭로 '눈엣 가시'

역대 중앙정보부장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1963년 7월~1969년 10월) 재임하던 김형욱은 부장에서 물러난 뒤 상실감에 시달리다 1973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정권 핵심부에서 차차 소외되더니, 대통령이 지명하는 유정회 국회의원 명단에서도 빠진 직후였다. 가족들은 미리 해외로 보낸 뒤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 김형욱은 곧 은둔생활에 들어간다.

권력 상실감과 타향살이 외로움에 빠져 도박등으로 소일하던 그는 1976~77년부터 본격적인 반정부 활동을 시작한다. 미 국회의원 등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불법적 로비를 조사하기 위해 개최된 미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한 것이다. 청문회에서 그는 박동선 게이트 및 김대중 납치사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좌익전력 등 민감한 부분에 대해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김형욱의 ‘반 박정희’ 활동은 의회 청문회에 이어 회고록 집필로까지 이어졌다.

박 정권으로서는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재미동포 ‘박사월’(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의 필명)이 김형욱과 함께 준비중이던 회고록에는 3공화국에서 실질적인 2인자였던 그가 알고 있는 정권의 온갖 치부가 다 포함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박 정권은 그의 재산 몰수를 위해 ‘반국가행위자 재산 몰수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비밀리에 통과시키고, 회고록 출판 중지와 귀국을 위한 전방위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주미 대사는 물론 김종필 총리, 민병권 전 교통부 장관 등이 그를 만나 신변 보장과 함께 귀국을 설득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1978년 그는 자신과 동향이자 중정에서 깊은 인연을 맺은 윤일균 중정 해외담당 차장과 접촉한 뒤에야 회고록 집필 중단에 합의했고, 그 조건으로 50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79년 4월 일본의 한 출판사에서 이 회고록 일부가 출판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해 10월 1일 그는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홀몸으로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가 7일 숙소에서 종적을 감췄다. 그가 이날 오전 어떤 동양인과 함께 호텔에 들른 뒤 저녁 7시께까지 카지노에 있었다는 것이 파리 경찰이 확인한 마지막 행적이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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