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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위로부터) ① 1958년만 해도 노들섬은 1만평 정도 크기였고, 주변에는 100만평의 ‘한강 백사장’이 형성돼 있었다. ② 서울시민들은 여름이면 노들섬 부근 한강 백사장에 몰려들어 물놀이를 즐겼다. ③ 2005년 노들섬은 과거보다 동서로 5배 가량 크기가 늘어났으며, 주변에 모래밭이 사라지고 한강물로 둘러싸여 있다. (맨위·가운데 사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제공 (맨아래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서울의섬] 1917년 인도교 세우며 흙돋워 ‘중지도’ 탄생
백사장 물놀이 “사람때문에 땅 안보일 정도”
1973년 개인땅으로…한강개발로 모래도 ‘실종’ “이촌동에서 노들섬까지 드넓은 모래밭이었어. 지금 같은 강이 아니었지. 잡풀과 갈대숲이 우거진 가운데 모래언덕과 물웅덩이 사이를 걸어 노들섬으로 물구경하러 가곤 했는데….” 지금은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40년 전만 해도 강북에서는 한강대교 중간에 있는 노들섬(중지도)까지 다리를 통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었다. 1950년대 용산에 살며 이곳을 찾았다는 배우리 땅이름학회 명예회장은 “노들섬 주변은 동서로는 동부이촌동에서 서부이촌동까지, 남북으로는 이촌동에서 노들섬까지 이어진, 100만평이 넘는 모래벌판이었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모래밭 마을’이라는 뜻의 ‘사촌’이라 부르고, 모래밭 쪽으로 해가 넘어가는 풍경을 ‘사촌모경’이라 해 용산 8경으로 치기도 했다.
모래언덕 가운데 하나였던 노들섬이 섬이 된 것은 일제강점기 들어서였다. 1917년 일제는 한강 북단의 이촌동과 남단 노량진을 잇는 ‘철제 인도교’를 놓으면서, 다리가 지나는 모래언덕에 흙을 돋워 다리 높이로 쌓아올리고, 이곳을 ‘중지도’라고 이름붙였다. 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된 둑을 34년 복구했을 때 이 타원형 인공섬의 남북 길이는 165m였다. 노들섬은 95년 일제지명 개선사업에 따라 바뀐 새 이름이다. 노들섬은 일제시대 창경원, 남산공원과 더불어 근대적 유원지로 사랑받았고, 최초로 한강에 건설된 철제 인도교도 사람을 불러모았다. 사람들에게 ‘철제 다리’를 밟고 한강을 건너는 경험은 ‘근대’를 실감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에는 노들섬까지 전차 궤도가 놓여 한강인도교 역이 생겼고, 노들섬은 가난한 연인들의 단골 데이트코스가 됐다. 해방 뒤에도 사람들은 섬 동쪽 고운 모래밭을 ‘한강 백사장’이라 부르며 여름엔 물놀이, 겨울엔 스케이트를 즐겼다. 50~60년대를 왕십리에서 산 박경호(60)씨는 “한여름에 전차를 타고 한강인도교 역에 내리면 백사장에 피서객이 넘쳐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여기서는 매년 국군의 날 에어쇼가 열리기도 했다. 노들섬과 한강 백사장은 68년 시작된 한강개발계획으로 유원지의 기능을 상실했다. 당시 계획의 뼈대는 한강 북단 이촌동 연안을 따라 한강제방도로(현 강변북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경원선 철길을 따라 놓인 기존 둑의 바깥쪽에 새 둑을 쌓고, 두 둑 사이를 ‘한강 백사장’에서 퍼온 모래로 메웠다. 수자원개발공사는 69년까지 한강대교 동쪽에서 파낸 290만㎥의 모래로 새 둑 안쪽을 메워 12만1827평의 새 땅(동부이촌동)을 얻었고, 모래준설업체인 공영사도 서쪽 6만505평(서부이촌동)을 추가로 확보했다. 노들섬의 풍경도 확 달라졌다. 진흥기업은 73년 노들섬(당시 중지제1도) 매립공사를 시작해 1만평이 채 되지 않던 노들섬을 4만5천여평으로 확장했고 이 땅을 국가로부터 넘겨받았다. 주변 모래밭은 매립에 사용돼 사라졌고, 그 자리에 강물이 들어왔다. 섬 둘레엔 시멘트 둔치도 생겼다. 사유지가 돼버린 노들섬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 잦아들었다. 그나마 중지도 주변에 듬성듬성 남았던 모래 더미는 82년 제2차 한강종합개발 때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저수로 정비 사업이 실시돼 아예 자취를 감췄다. 매립지에는 한강맨션, 신동아아파트 등 이촌동 아파트단지가 한강을 병풍처럼 둘러쳤고, 80년대 초반까지 7천여가구가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절 한강 정비를 통한 도시 성장과 경제 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강홍빈 서울시립대 교수(도시공학·서울시 전 부시장)는 “이때부터 한강의 공공성과 접근성이 상처받았다”고 말했다. 눈부시게 펼쳐졌던 노들강변 모래벌판은 장미맨션(15층), 삼익아파트(12층) 등 최초의 고층 아파트단지 지하로 들어가버렸다. 80~90년대를 거치며 이 일대 아파트는 최고 20억원이 넘는 고급 주택으로 떠올랐다. 현재도 이 지역 아파트 주민들은 재건축을 통해 더 나은 ‘그들만의 조망’을 확보하려 들고 있다. 20일 가본 노들섬 서쪽에는 강의 퇴적작용이 활발히 이뤄져 시멘트 둔치를 따라 100여m 가량 자갈과 모래가 쌓여 있었다. 지금이라도 시멘트 둔치만 걷어내면 자연스런 모래밭이 다시 나타날 것 같았다. 청둥오리 등 철새는 도래지인 밤섬에서 이곳까지 날아들어 물고기를 낚아채고 있었다. 이촌동 토박이 김명희(58)씨는 “노들강 모래밭에 나가 냉이와 쑥을 캐 저녁 찬거리로 삼았던 시절이 있었다”며 “고층 아파트에 가려 한강조차 보이지 않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가 돼버렸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30년 버려진 섬…서울시 “395억에 사겠다” 활용방안 갑론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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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섬과 한강 백사장에 사람을 다시 불러모을 수는 없을까. 그 첫 단추는 이미 채워졌다. 서울시는 2009년까지 노들섬에 오페라하우스를 축으로 하는 문화단지를 조성하기로 하고 395억원의 예산을 마련해 최근 소유주인 건영과 매입 협상에 들어갔다. 이르면 다음달 안에 협상이 완료되고 올해 안에 사업에 들어간다. 노들섬은 서울의 최중심부에 있는 섬이면서도 한강개발사업 뒤 버려진 섬이었다. 섬 전체 면적은 4만5천여평으로 서쪽은 테니스장이고 동쪽은 나대지다. 조선총독부와 대한민국 건설부 소유였던 이 땅은 한강종합개발 과정에서 민간에 넘겨졌다. 유람선 선착장, 국제 컨벤션센터 등 다양한 개발방안이 제시됐지만, 그때마다 무산돼 30여년 동안 방치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노들섬을 다시 활용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면서도, 그 방식을 두고는 의견이 갈렸다. 라도삼 시정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이곳이 역사적으로 놀이공간이었다는 점에서 오페라하우스는 장소의 역사성을 살리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심재옥 서울시 의원(민주노동당)은 “즐길 사람들이 한정된 오페라 공연장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한강과 탄천 합류지점에 모래밭이 형성되는 것처럼 한강의 생태 복원력을 활용해 자연형 하천으로 꾸며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양장일 서울환경연합 사무처장은 “백사장 복원 등 한강을 본래의 자연형 하천과 가깝게 만드는 기본계획을 수립한 뒤 섬 활용방안을 결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2002년 한강 전 구간을 걸어서 답사한 역사기행가 신정일씨는 “강의 생명은 흐름이고, 그 흐름은 곳곳에서 자연스런 굽이를 만드는데, 한강은 근대화를 거치며 직선화돼 양평 정도는 가야 물굽이를 볼 수 있다”며 “노들섬 시멘트 둔치를 부숴 모래가 다시 쌓이게 하고, 잠실 수중보를 철거해 곳곳에 굽이와 여울을 만든다면 한강도 어느 정도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종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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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대교는 웁니다
한국전쟁때 폭파 수백명 사상…서민들 ‘자살다리’로도 ‘오명’
‘강원도 뗏목 장수 뗏목 빼앗기고 울고 가고/ 전라도 알곡 장수 통배 뺏기고 울고 가면/ 삼개(마포) 객주 발 뻗고 운다네/ 노들나루(노량진) 색주가 여인은 머리 잘라 파는구나’(조선 후기 노래 〈한강원가〉)
조선 후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수원성 현륭원을 매년 두 차례씩 다녔다. 이때마다 조정은 800여척의 크고 작은 한강의 배를 징발해 배다리를 만들었다. 임금은 배 위에 소나무 판자를 깔고 행차하는 호사를 누렸지만, 생업을 중단해야 하는 한강 주변 백성들의 원성은 컸다. 그래서 나온 게 ‘한강원가’다. 1917년 한강에 처음 설치된 인도교는 수십년 동안 한강의 명물이었다. 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가치관 혼란과 식민지 치하의 음울한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자살도 끊이지 않았다. 어찌나 심했던지 일제는 다리 난간에 “잠깐 기다리시오”라는 팻말까지 붙여놓았다. 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6월28일 국군은 북한군의 남하를 늦추기 위해 한강 인도교를 예고 없이 폭파해 수백명의 사상자를 냈다. 81년 4차로 쌍둥이 다리로 개축돼 ‘한강대교’로 이름이 바뀐 이곳은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자살이 늘어나면서 ‘자살 명소’라는 악명을 덜었다. 그러나 2000~2002년에도 모두 349건으로, 한강다리 가운데 가장 자살이 많았다. 2000년대 초부터는 반원형 아치에 올라가 고공시위를 벌이는 이들이 늘었다. 용산경찰서 관계자는 “한강 용산구 구간에서 발견되는 주검은 한해 60~80건, 아치에 올라가 벌이는 자살소동은 한해 1~2건 정도로 과거보다 많이 줄었다”며 “최근에는 고공시위가 주요 순찰 대상”이라고 말했다.
남종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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