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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연세대 기록물보존소가 공개한 ‘2·28 대구학생 데모의 동기’. 4·19 직후 당시 경북고 학생부위원장이었던 이대우 부산대 교수가 직접 쓴 것이다. 학생임을 증명하듯 수학 문제를 풀다 만 종이 뒷장에 써내려간 것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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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사 “공산당”폭언…시민은 박수사례
연세대 연구반, 4·19 도화선 생생한 기록
“자유당 정치 12년간의 온갖 악정은 드디어 보안법이라는 세기에 보기 드문 악법을 만들어 국민의 귀와 입을 틀어막았으니 자유와 기본인권을 박탈당한 국민들의 울부짖음과 무언의 반항은 그 절정에 다다랐던 것이다… 고등학생들은 무언의 의사통일이 되어 불의에 반항하는 저항의식은 기성세대의 썩은 무리들 틈바구니에서 고이고이 불꽃을 튀기며 자라나고 있었다.” 1960년 4월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2·28 대구학생 민주의거 45돌을 일주일 앞둔 지난 21일 이대우 부산대 교수(63·윤리교육)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의거 당시 자신이 직접 쓴 ‘대구학생 데모의 동기’를 보고는 서둘러 안경을 고쳐 썼다. 이 교수는 “4·19 직후 연세대 학생들이 찾아와 2·28 의거에 대해 조사를 해 갔다”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한겨레>가 입수한 이 자료는 현재 연세대 기록물보존소에 보관 중인 것으로, 당시 연세대 학생들로 이뤄진 ‘4·19역사연구반’이 4·19 뒤 대구에 직접 내려가 조사한 2·28 관련 증언들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2·28은 당시 3·15 총선에 앞서 대구 지역의 학생들이 궐기해 자유당 독재체제에 항거한 의거로, 4월혁명의 시작을 여는 도화선이었다. 2·28은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 학생의거로 이어졌고,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 열사의 주검이 4월10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며 4월19일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났다. 2·28은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의 대구 유세일이자 일요일인 1960년 2월28일, 학생들이 민주당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당국이 내린 ‘일요등교’ 지시가 발단이 됐다. ‘데모사항 조사서’에는 하루 전인 27일 오후 대구 동인동 이 교수 집에 경북고·대구고·경북대부속고 학생 8명이 모여 시위를 조직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들은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학원에 자유를 달라’는 구호를 정하고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는 결의문을 작성했다. 당시 경북고 학생부위원장이었던 이 교수는 “학생들은 일요등교 지시가 왜 나왔는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울분에 수업이 끝난 뒤에도 학생들 사이에 토론과 논쟁이 계속됐다”고 말했다. 누렇게 바랜 8절지 크기의 조사서 수십장은 학생들이 보고, 외치고, 느꼈던 당시의 상황을 ‘날것’ 그대로 전하고 있다.
60년 2월28일 오후 1시. 경북고 운동장에 모인 800여명의 학생들은 대구 반월당을 거쳐 도청으로 쏟아져 갔다. 대구고·경북여고 등 여러 고교 학생들이 속속 합류하기 시작했다. 유세장으로 향하던 장면 박사를 만난 학생들은 ‘만세’를 불렀다. 조사서를 보면 당시 도지사는 눈물을 흘리며 저항하는 학생들을 향해 “이놈들 전부 공산당”이라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반면, 당시 대구 시민들과 관련해서는 “구타당하는 학생을 경찰에게 달려들어 말리고 (학생들을 향해) 박수를 쳤다. 치맛자락에 모자를 감추어 학생을 숨겨주는 부인이 대부분이었다”고 반응을 전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일제 때 국채보상운동에서 2·28 의거로 이어져온 ‘대구 정신’이 수구·보수화하는 것에 자성이 필요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당시 연세대 4학년으로 ‘4·19 역사연구반’에 참여했던 김달중 연세대 명예교수(정치외교)는 “4·19혁명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하기 전부터 서울은 물론 대구·마산·부산의 4·19 관련자들을 찾아다녔다”며 “이 자료는 2·28에서 4·19로 이어지는 숨가빴던 역사적 상황을 현장 참여자들의 육성을 통해 가공 없이 담아낸 최초의 기록”이라고 설명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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