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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28 18:58 수정 : 2005.02.28 18:58

뤼순감옥의 뒷산에서 한 주민이 안중근 의사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안 의사 매장 터는 사진 왼쪽 구석에 보이는 3층짜리 흰색 다세대 건물의 오른쪽 뒤편으로 추정된다. 뤼순/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잠들지 못한 넋’ 무덤흔적 사라져

소나무숲이 우거진 산은 방치돼 버려져 있었다. 소나무 가지를 헤치고 10분 정도 오르자, 어느새 꼭대기였다. 높이 100m가 채 못 돼 보이는 나즈막한 언덕은 감옥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그 안에 잠든 억울한 넋들을 보듬기에 넉넉했다.

지난 25일, 재중동포 안내원은 산 아래 자동차에 숨어 “중국 공안에게 걸리면 모두가 끝장”이라며 “빨리 내려오라”고 소리쳤다. 중국 랴오닝성 뤼순(=다롄)은 군항을 품은 항구도시여서 외국인 출입이 금지돼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목숨을 끊어 동양평화를 지키려던 젊은 넋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95년째 이곳에서 구천을 헤매는 중이다. 눈을 들어 남쪽을 향하니, 항구 너머 보이는 발해만의 푸른 물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1911년 찍은 사진속 위치 소나무숲·주택 들어서
전면발굴땐 찾을 가능성

안중근은 서른둘의 나이로 이곳 향양가 139호 원호방 ‘뤼순 감옥’(여순일아감옥구지)에서 사형돼, 뒷산 ‘수인 묘지’에 묻혔다. 그는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3분께 교수돼 12분 만인 10시15분께 숨을 거뒀다. 교수대 위에서 “동양평화 만세!”를 외치려 했지만 간수들이 막았다고 전해진다. 두 동생에게 유언으로 “천국에 가서도 국권 회복을 위해 애쓰겠다”는 말을 남겼다. 목숨을 잃던 날, 새벽부터 이른 봄비가 왔다고 한다.


▲ 뤼순감옥 옥장의 딸이었던 이마이 후사코가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등 한국 학자들에게 공개한 사진. 안 의사가 숨을 거둔 지 1년 뒤에 찍은 것으로, 사진에 보이는 화살표는 이마이가 표시한 안 의사 유해 매장 추정 지점이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제공
만주에서 발행된 1910년 3월27일치 <만주일일신문>을 보면, “안 의사의 동생인 정근과 공근이 유해 반환을 요구했지만 일제의 거부로 통곡하면서 귀국길에 올랐다”는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다. 일제는 안중근을 죽였지만, 그에 대한 두려움까지 떨치지는 못했다. 무덤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은 가족들에게 묘지 위치조차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옷깃을 여미며 구릉을 헤치는 발걸음이 초조하고 다급했다. 지난 95년 동안 안 의사 유해 발굴은 한·중·일 학자들의 뜨거운 관심사였다. 이 문제가 최근 다시 부각된 것은 지난해 12월22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광복 60주년 기념사업으로 남북한이 공동으로 협력해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히면서부터다. 그동안 안 의사 관련 자료가 발굴될 때마다 말은 무성했지만, 정부 고위 관계자가 나서 발굴 가능성을 거론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95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3층짜리 아파트와 단층 집들이 묘지를 파고 들어 수많은 무덤들이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반대로 산 중턱에는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새 무덤들이 듬성듬성 자리잡고 있다.

정 장관 발언의 배경에는 안 의사가 숨질 때 뤼순 형무소장의 딸이었던 이마이 후사코(사망)가 최서면 국제한국원장 등 한국 학자들에게 건넨 두 장의 사진(사진 왼쪽)이 단초가 됐다. 이 사진은 1911년 추도회가 끝난 뒤, 형무소 직원들로 보이는 남자 10여명과 사형수 가족 20여명이 함께 찍은 것이다. 이마이는 10살 때 본 안 의사 매장지를 떠올려 사진 위에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 화살표를 그려 넣었다. 이를 바탕으로 최 원장 등은 지난해 10월께 현장을 답사한 뒤, 안 의사 무덤이 ‘북위 38도49분3초, 동경 121도15분43초’에 있다는 잠정 결론을 냈다.

▲ 뤼순감옥에서 사형당한 사형수들을 감옥 뒷산에 파묻은 형태를 재현해 놓은 전시실에는 당시 유골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일제는 사형수의 주검을 작은 나무통에 넣어 뒷산에 표지 없이 그냥 파묻었다고 한다. 뤼순/윤운식 기자 yws@hani.co.kr
그렇지만 27일 <한겨레> 취재진의 현장 확인 결과 유해 발굴을 확신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이마이가 한국 학자들에게 건넨 사진에 표시된 화살표 지점을 찾아가 보니, 화살표 지점 바로 앞까지 3층짜리 다세대 주택이 침범해 있는 것이 확인됐다. 화살표 지점에는 봉분은커녕, 그곳에 무덤이 있었다는 흔적조차 없다. 산에서 만난 70대 촌로에게 물으니 “이 주변에 조선 의인 안중근의 묘가 있었다는 소리를 들었다”며 “80년대부터 조선 사람이 자주 이곳에 다녀갔다”고 말했다.

이곳을 자주 찾은 재중동포 학자들은 유해 발굴 가능성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황유복(62) 중국 중앙민족대학 교수는 “80년대 중반부터 북한 정부와 중국 내 조선족 학자들이 유해 발굴을 위한 조사에 나섰지만 모두 실패했다”며 “무덤 추정 터를 찾을 수는 있겠지만, 유해 발굴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 원장도 “나로서도 학자 입장에서 추정 터를 제시한 것일 뿐, 발굴 작업은 정부가 중국 쪽과 대화로 풀어갈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아직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 뤼순 감옥 안에 만들어진 수인 묘지 모형을 보면, 일제는 사형수를 목매달아 죽인 뒤, 주검을 나무통 모양으로 생긴 관에 넣어 목책 박듯이 빽빽이 묻은 것으로 나타난다. 나무통에는 사형수의 이름도 신분도 표시되지 않았지만, 안 의사는 나무통이 아닌 소나무 침관에 묻혔다. 묘지 추정 터 부근을 전면 발굴해 본다면 의외로 쉽게 유해가 발굴될 가능성도 있다.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안 의사의 유해가 발굴된다면 남북 모두 기념할 수 있는 뜻깊은 장소를 정해 유해를 모셔 기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내려 오늘 길에 인기척에 놀란 꿩 10여 마리가 야산의 정적을 깨고 하늘로 날아 올랐다.뤼순/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중국도 발굴자료 검토중”

판무충 귀순감옥 소장

판무충 ‘뤼순 감옥’ 소장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쪽에서도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위해 작업이 진행 중”이라며 “중국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는 만큼 결과를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뤼순 감옥은 공식 절차를 통한 외국 취재진의 접근이 금지돼 있어 <한겨레>는 판 소장과 전화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통역은 중국 시안에 있던 광복군 2지대 군의 엄익근의 손자 엄창휘(42)씨가 맡았다.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과 관련해 중국 쪽의 움직임이 있나?

=있다. 관련 자료를 검토해 살펴보는 중이다.

-지난해 한국 관계자들이 뤼순 감옥에 다녀갔다는데?

=김삼웅(현 독립기념관장)씨가 다른 관계자 한 명과 함께 지난해 말에 다녀갔다. 그 외에는 없다. 최서면씨 등은 만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김삼웅 관장은 “뤼순 감옥에 지금까지 3번 가봤으며, 지난 2000년 판 소장과 만나 안 의사와 관련된 질문을 했지만 구체적인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고 확인했다.)

-발굴 절차는 어떻게 되는가?

=뤼순은 공개적으로 개방될 수 없는 곳이다. 발굴이 이뤄진다면, 중국 정부에서 다시 방침이 나올 것이다. 지금 상태에서 뭐라 말하기 어렵다.

-유해 발굴 가능성은 어느 정도로 보는가?

=위에서 추진한다고 했으니까 결과를 기다려 봐야 한다. 결과를 속단하기는 어렵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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