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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03 17:32 수정 : 2005.03.03 17:32

5.16군사쿠데타 직후 발생한 <민족일보> 사건은 우리 법조계에 법관의 양심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신문의 발행인 조용수 사장은 31살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68.11.21/<대한민국 정부기록 사진집>



밝혀야 할 국정원 과거 <7> 언론탄압

“한국 정부가 중앙정보부를 통해 언론에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선거 기간이 아닌 시기에도 중정에 언론특별팀을 두고 보도될 것과 되지 말 것을 통제하고 있다. 현재 중정 직원들은 언론사를 점점 더 자주 드나든다.”

1967년 브라운 주한 대사가 번디 미국 동아태차관보에게 한국 상황을 보고한 편지 내용의 일부다. 67년 당시 이미 중정의 언론 통제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중정은 언론사에 밀착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권의 입맛에 맞게 언론을 요리하고, 언론사의 존립과 기자들의 해직에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71년 대선 뒤에는 아예 언론사에 상주하면서 노골적인 언론 통제를 일삼았다. 축적된 중정의 언론 관련 정보는 1980년 언론통폐합 때 이른바 ‘언론사·기자 살생명부’를 작성하는 데 활용됐다. 이런 언론 관리 노하우는 1990년대 후반까지 언론사 내부 인사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언론 공작을 벌이는 밑거름이 됐다. 국정원으로 간판을 바꾼 지금도 ‘언론 통제’는 없어졌지만, 언론팀이 각 언론사마다 ‘담당’을 정해 정보수집과 보도 동향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

민족일보 - "간첩자금 받아 북 선전" 조용수 사장 사형
동아일보 - 기자들 유신협조 거부하자 광고해약 지시
한겨레 - 안기부법 비판 기사, 광고탄압으로 대응

◇ <민족일보>·<대한일보> 폐간=1961년 5·16 쿠데타 직후인 5월19일 지령 92호를 끝으로 발행이 중단된 <민족일보>의 폐간과 사장 조용수씨의 사형은 중정이 기획한 또하나의 ‘사법살인’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18일 조씨를 비롯한 <민족일보> 직원들이 서울 중부경찰서로 끌려갔고, 중정에서 나온 요원들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조씨는 “간첩 이영근으로부터 조총련계 자금을 받아 신문을 만들면서 북한 괴뢰집단에서 주창하는 평화통일을 선전했다”는 혐의로 그해 12월21일 사형됐다.

김자동(77·민족일보 진상규명위 위원장)씨는 “중정이 조씨에게 자금을 댔다고 주장한 간첩 이영근은 조씨가 사형된 뒤 <통일일보>를 발행하면서 한국에 지사까지 차렸고, 사후에는 노태우 정권으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까지 받았다”며 “이영근이 간첩이라면 우리 정부가 간첩에게 훈장을 준 것이냐”고 반문한다.

중정 직원이 <민족일보> 폐간 후 신문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재산을 개인적으로 착복하는 일도 벌어졌다. 조씨의 동생 용준(70·전 <민족일보> 기획부장)씨는 “박정희 정권 때 청와대에 ‘몰수한 개인 재산은 돌려달라’고 진정을 넣었는데 중정 이용택 국장이 <민족일보> 조사를 맡았던 직원 유아무개 대위가 개인적으로 착복해서 중정에서 처벌했다고 당당하게 밝히더라”며 “중정이 <민족일보> 폐간에 깊숙히 개입했다는 걸 버젓이 인정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1973년 5월15일 ‘자진 폐간’한 것으로 알려진 <대한일보> 폐간에도 ‘중정 개입설’이 정설로 굳어있다. <대한일보>는 사주 김연준(91·한양대 재단이사장)씨가 수재의연금을 유용한 혐의로 구속된 지 13일만에 문을 닫았다.

김씨는 자서전에서 “미운털이 박히게 된 것은 절대로 정치자금을 내놓지 못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뒤부터였다”고 밝힌 바 있다. <대한일보>의 역사를 정리한 책 ‘신문은 죽어서도 말한다’를 쓴 신동철(67·전 대한일보 기자)씨도 전화 인터뷰에서 “폐간의 표면적 이유가 된 수재의연금 사건을 중정이 맡아서 처리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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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사태=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해 박정희 유신 체제에 협조하기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이에 <동아일보>가 63년 대선 이틀 전 호외를 통해 자신의 좌익전력을 폭로한 이후 이 신문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박 대통령의 지시로 신직수 중정 부장이 양두원 보안담당차장보를 통해 광고탄압을 시작했다.

12월20일부터 광고주들이 “이유는 묻지 말라”며 일방적으로 광고를 해약했고 대신 ‘동아여 휘지 마라. 우리가 있다’는 등 국민들의 격려광고가 광고지면을 채웠다.

광고탄압이 계속되자 동아 경영진은 자유언론운동에 앞장섰던 기자·프로듀서·아나운서 등 130여명을 내쫓았다. 이후 광고탄압은 서서히 풀렸다.

75년 <동아> 해직기자인 박종만(62·동아투위 위원)씨는 “광고 탄압이 풀린 배경에 관해 김상만 사장이 중정 부장에게 협조를 약속하는 각서를 썼다는 설도 있고, 박정희가 국제사회를 의식해 광고탄압을 중단하라는 외교라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설도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동아투위 대변인을 지낸 이부영(63·전 열린우리당 의장)씨는 “1979년 12월께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됐을 때 서울구치소에서 10·26 사건으로 구속된 박선호(중정 의전과장)씨를 만났는데 ‘김상만 사장이 신직수 부장에게 문서로 협조 약속을 한 뒤 광고탄압이 풀렸다’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신 부장이 김재규 부장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할 때 김 사장이 신 부장에게 언약을 한 서류를 박씨가 넘겨받아 봤다는 것이다. 이씨는 “그 서류에 ‘국가 수행 방침에 적극 협조한다는 것과 해직된 기자들을 복직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이 포함돼 있었다’는 게 박씨의 말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동아일보사는 무더기 해직 등에 대해 “경영합리화를 위한 기구정비 과정에서 일부 기자들이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되면서 비롯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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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광고탄압=안기부가 작성한 <한겨레 종합분석>이란 문서가 2001년 3월 공개돼 <한겨레>에 조직적으로 광고 탄압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1997년 4월5일 작성된 이 문건에는 <한겨레>를 ‘친북 좌익세력 지원 언론’으로 규정하고, “정부부처 및 산하 정부투자기관에 한겨레신문 광고를 중단하도록 하고, 전경련 등과 협조해 대기업 광고가 점진적으로 줄어들도록 한다”고 탄압 계획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경영·편집 간부 등 전 직원에 대한 대공용의점을 정밀 내사하고, 대출된 자금 100억원의 상환기간 연장 및 추가대부를 금지한다”는 장기계획도 밝히고 있다.

실제 이 문건이 작성된 이후부터 정부투자기관과 대기업들이 <한겨레>에 눈에 띄게 광고를 줄였고, 예약된 광고를 취소하는 기업도 생겼다. 광고탄압 당시 <한겨레> 광고국장을 지낸 최계식씨는 “기업의 광고 실무자들이 <한겨레> 광고 담당들에게 광고 취소 사유가 안기부 때문이라고 털어놓기도 했고, 한 대기업 홍보실에서는 안기부로부터 압력을 받았다는 확인서를 써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 <한겨레>는 ‘안기부 대해부’ 시리즈 기사를 통해 정면으로 안기부를 비판하면서 정권 쪽에도 강력한 항의의 뜻을 전달했고, 이후 광고 해약 사태는 진정됐다.

당시 수사권 강화를 내용으로 하는 안기부법 개정 논란이 들끊던 96~97년 사이 <한겨레>가 안기부법 개정을 비판하는 기사를 잇따라 실은 것이 광고 탄압의 배경이 된 것으로 분석됐다. 이 일과 관련해 서울지법은 지난해 10월 “언론의 자유와 법인으로서 영업활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며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과 박일룡 1차장 등에게 “한겨레에 7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바 있다. 하지만 국정원은 여전히 이런 불법행위를 시인하지 않고 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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