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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03 17:43 수정 : 2005.03.03 17:43

1971년 <조선일보> 기자들이 발표한 ‘언론자유선언문’과 1975년 <동아일보> 기자들의 선언문에는 공통적으로 ‘기관원 출입 금지와 기자들의 강제연행을 거부한다’는 결의가 들어있다. 언론사에 ‘기관원’으로 불리는 중정 직원과 경찰관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기관’의 눈 밖에 난 기자들은 수시로 불법 연행돼 감금·구타를 당했기 때문이다.

“새벽에 야근하고 있으면, ‘남산입니다. 방금 외신 기사 하나 들어왔죠. 그 기사는 싣지 마세요’하는 전화를 종종 받았다. 야근 일지에 ‘남산 기사 홀드 요청’이라고 쓰고, 기사는 편집부에 넘겼다. 그러나 중정에서 정권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외신 기사들은 대부분 지면에 나오지 못했다.” 60년대 후반 조선일보 외신부에 근무했던 신홍범(64·전 조선투위 위원장)씨의 얘기다.

신씨와 한 부서에 근무하던 조화유 기자는 미국 신문에서 미국 중앙정보부를 비꼰 표현을 ‘중앙무지부’라고 직역했다가 남산에 불려가 곤욕을 치렀다. 미국 중정을 모독하는 것은 곧 한국 중정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71년 대선뒤 언론사마다 '기관원' 상주
'공공요금 현실화' '학원사태' 용어까지 지정
기사 검열·삭제…'삐딱한' 기자 감금·폭행도


중정은 기사 크기뿐 아니라 용어까지 통제했다. 공공요금이 올라도 ‘인상’이라는 단어 대신 ‘현실화’‘재조정’이라고 쓰고, ‘학생 데모’는 ‘학원 사태’로 바꿔쓰도록 했다. 중정이 이렇듯 신문 편집 전반에 걸쳐 간섭을 일삼자 70년대 <동아> 기자들은 자조적으로 당시 중정의 <동아> 담당인 방준필씨를 ‘방주필’이라고 불렀다.

중정은 평소 정권에 우호적이지 않은 기자들은 기사와 관련을 짓거나 다른 꼬투리를 잡아 남산에 연행해 길들이기를 했다. 언론사에서 동료 기자가 며칠씩 신문사에 나타나지 않으면 주변에서는 ‘또 남산에 불려갔구나’하고 짐작할 정도였다. 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사를 끈질기게 추적 보도했던 <동아일보> 김아무개 기자는 남산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뒤 관련 취재를 중단해 버렸다. 동아방송의 한 프로듀서는 남산에 끌려갔다 나온 뒤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

70년대 <중앙일보> 파리 특파원을 지낸 주섭일(69·도서출판 사회연대 회장)씨는 “1973년 8월 중정의 허가를 받아 폴란드 아우슈비츠에 취재를 다녀와서 쓴 방문기가 중정 검열을 거치면서 대부분 삭제됐다”며 “문화 관련 기사들은 무사히 지면에 나갔지만, 정치·사회쪽 기사가 사라지는 일은 흔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특파원들은 현지 통신사에서 텔렉스를 이용해 서울 전신국으로 기사를 보냈는데, 중정이 기사를 언론사보다 먼저 받아보고 손을 썼다는 것이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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