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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04 21:55 수정 : 2005.03.04 21:55

을사조약 체결 당시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았던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의 경남일보 주필 시절에 실린 일본 천황 찬양시를 놓고 친일논란이 일고 있다.

4일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위암이 주필로 있었던 경남일보 1911년 11월 2일자 1면에는 두 개의 일장기 그림 아래 일본 황제의 생일인 `천장절'을 축하하는 한시가 실렸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신문에 실린 한시는 일본 천황을 `혁혁한 태양'으로 묘사했으며 `천황의 덕과 은혜가 온 백성에 미쳐 빛나는 위엄으로 동양의 기초를 세웠다'는 내용 등의 문구를 담고 있다.

연구소 김경현 연구원은 "당시 신문들이 기명기사를 내지 않았던 관행에 비춰보면 위암이 한시를 직접 지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당시 주필의 역할을 고려할 때 일본천황을 칭송한 한시는 위암의 판단 아래 게재됐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연구소는 안중근 의사에 암살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한 한시를 실은 이 신문 1909년 11월 5일자 2면도 함께 공개하면서 당시 주필이었던 위암의 친일행적 의혹을 제기했다.

경향신문 5일자 1면에서, 민족문제연구소 김경현 연구원은 4일 “장지연은 강점 이듬해인 1911년 경남일보 11월2일자 1면에 일본왕 메이지(明治)의 생일인 천장절을 축하하는 한시와 일장기를 싣는 등 앞장서서 일제를 찬양하는 기사를 썼다”고 주장하며 증거로 경남일보 영인판을 제시했다.


지금까지 학계에선 장지연이 경남일보 폐간 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실었던 기고를 두고 부분적으로 친일행적 논란을 제기해오긴 했으나,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명백한 친일행적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김 연구원의 주장에 따라서 앞으로 중·고교 국사교과서에까지 항일 언론인, 우국지사로 묘사된 장지연에 대한 재평가에 대한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영남대의 경남일보 영인판 분석 결과 장지연은 1909년 10월 창간된 경남일보 초대 주필이 된 뒤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한 1913년 3월까지 4년 가까이 이 신문의 주필을 지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 경남일보는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10월11일자에 일제 강압에 의해 국권이 찬탈당한 것이 억울해 음독자살한 매천 황현의 ‘절명시’를 게재했다가 정간된 뒤 10일 만에 복간되었으나, 이후 논조가 친일로 바뀌었다고 김 연구원은 설명했다.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위암 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도 위암의 친일 폭로에 곤혹스러워 했다. 위암 기념사업회 이종석 부회장은 “순수한 언론인으로서 항일계몽운동에 나선 사람으로는 위암이 거의 유일하다”며 “위암이 한때 친일행위를 한 것을 두고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라고 말했다. 학계 역시 위암의 친일 행위를 신중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남대 윤선자 교수(사학)는 “위암의 친일행적은 학계에서 다 아는 사실”이라면서 “시일야방성대곡 이외에 일진회를 비판한 ‘정(呈)정부문’ 등 항일적인 글을 적지 않게 발표한 위암을 친일파로 보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라고 말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연합


[위암 장지연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오늘 목놓아 통곡하노라)
1905년 을사조약체결 당시 황성신문 게재

지난 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 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 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고 하여금 남의 노예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라 말이냐.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여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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