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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시국사건이라지만 적용 죄목을 결정하는데 안기부장의 허락을 얻으라니 이는 명백한 위헌이었다. 법이 장식에 머무르고 권력기관이 법 위에 있던 시절이라지만, 검사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기에 사표를 낼 수 밖에 없었다.”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1년 4월 안기부가 전두환 정권 반대 시위를 벌인 대학생들을 내란죄를 적용해 송치한 사건이 서울지검 공안부 구상진 검사에게 배당됐다. 안기부, 반정권 학내시위 ‘내란죄’로 송치
“집시법 적용” 품신 올리자 “죽이겠다”전화
“요구 들어주라”총장 공문에 사직서 제출
“사건 자체는 흔한 학생 시위에 불과했다. 연세대 학생 20~30명이 학내에서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뿌리다가, 교내에 상주하던 형사들에 의해 몇분만에 붙잡혀 온 사건이다. 하지만, 당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여서, 학생 시위에 대해 신군부와 안기부가 초강경 대응에 나선 것이다.”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4명 가운데 한명이었던 장신환(현 원광디지털대학교 교수)씨도 “남산에서 두달 가까이 갇혀 있으며 고문을 당했지만 이런 정도 시위로는 풀려나오는 대학생도 많아 구속까지는 생각도 못했다”며 “전두환 정권 퇴진 주장이 내란죄로 둔갑해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내란’으로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판단한 구 검사는 서울지검장의 결재를 받아 안기부장과 법무부 장관 앞으로 적용 죄목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바꾸는 품신을 올렸다. 당시 안기부가 송치한 사건의 죄목을 검사가 바꿀 경우에는 안기부장의 허락을 얻도록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런 답신이 없었다. 한동안 집으로 “당장 죽여버리겠다”는 전화가 걸려오고, ‘서울지검에 빨갱이가 있어 손좀 봐야한다’는 말도 나돌았다. 결국 구속 만기(30일)를 하루 앞두고서야 검찰총장이 “안기부 요구대로 내란죄로 기소하라”는 공문을 보내왔다. 구 검사는 사표를 냈고, 이 사건은 공안부 동료였던 정형근 검사(현 한나라당 의원)에게 넘어갔다. 정 검사는 안기부에서 송치한대로 내란죄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다. 1심 재판부에서는 내란죄를 인정했지만, 2심 재판부는 내란죄 부분에 무죄를 선고했다. “혹시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퇴임 뒤 몇년 동안은 외부인사 접촉도 피했다. 전임 근무지였던 광주지검에 안기부 요원들이 찾아와 내가 처리한 사건 기록을 전부 가져갔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그런데, 내란죄가 법원에서 인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괜한 바보짓 했다’는 생각까지 들더라. 하지만, 이제는 이런 잘못된 관행은 많이 사라져 다행이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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