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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1971년 ‘항응접대’를 이유로 이범렬 부장판사 등의 구속영장이 청구됐다는 소식을 들은 서울형사지법 판사 42명 가운데 39명이 일괄사표를 쓰고 있다. 흔히 ‘사법파동’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와 검찰 등 행정부의 노골적인 재판 간섭에 판사들이 집단 항거한 일로, 사법권 독립을 여망하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에도 중정은 법원 출입 조정관과 법원 수뇌부 등을 통한 ‘은밀한 압박’을 계속해 갔고, 이는 198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보도사진연감> 밝혀야 할 국정원 과거 <8> 사법권 침해
1964년 5월21일 새벽,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벌였던 학생들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수경사 소속 무장 군인들이 법원에 난입했다. 군인들은 영장을 기각한 양헌 판사(현재 변호사)의 집에까지 찾아가 영장 발부를 강요했다. 5·16 쿠데타를 주도한 군부세력의 사법관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야당과 언론을 비롯한 각계에서 “사법권 독립 침해를 규탄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런 ‘거친 방식’으로 사법부에 압력을 가하려다 여론의 호된 질타를 당한 박정희 정권은 이후 중앙정보부를 활용해 검찰과 법원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일반 행정부처와 마찬가지로 법원에도 조정관을 둬 시국·공안 사범 재판에 참견하고, 교묘한 방법을 동원해 판사들에게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 중정의 압력과 검사들의 사표=1964년 중정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지하조직을 만들고 정부를 전복 음모를 꾸몄다는 (1차) 인민혁명당 사건과 관련해 교수·언론인·학생 등 41명을 구속했다. 발표 당시부터 고문·조작설이 분분했던 이 사건을 두고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이 혐의 입증이 어렵다며 기소를 거부하고 나섰다. 이에 김형욱 중정부장은 검찰 수뇌부에 전화를 걸어 거칠게 항의했다. 결국, 검찰 수뇌부가 기소를 지시하자 공안부 검사 4명 가운데 이용훈 부장 등 3명이 사표를 냈다. 사표는 수리됐고, 수사와 무관했던 당직 검사(정명래 전 사법연수원장·사망)가 수사 검사들을 대신해 기소장에 서명했다. 사건을 담당한 판사들도 극심한 압력에 시달렸다. 1심 재판부 배석 판사였던 하경철 변호사(전 헌법재판관)는 “정보부가 검찰을 통해 어찌나 집요하게 괴롭히던지 합의부 판사 3명은 법원이 아닌 김창규 부장판사 집에서 일주일동안 합숙하며 판결문을 썼다”며 “피의자 가운데 3명만 유죄가 인정됐는데, 또 어떤 압력이 들어올지 몰라 판사들은 판결 직후 시내로 도망 아닌 도망을 나왔다”고 말했다. 법원에 조정관 두고 공안재판 일일이 간섭
◇ 조정관들, 판사에 압력=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세번째 대선을 치른 직후 당시 대표적 시사지였던 <다리>지 필화사건이 터졌다. 사회평론가 임중빈씨가 기고한 ‘사회 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 반공법에 위반된다며, 검찰이 필자와 주간, 발행인을 구속한 것이다. 당시 이 사건을 맡은 서울형사지법 목요상 판사(전 한나라당 의원)는 “당시 형사지법을 출입하던 4명의 조정관 가운데 팀장인 구씨라는 사람이 판사실에 수시로 찾아와 ‘고위층에서 이 사건에 관심이 많다’ ‘그런 나쁜 놈들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 ‘잘못하면 신상에 좋지 못할거다’라며 협박을 했다”며 “피의자 두명을 직권보석으로 석방한 뒤에는 아예 사건을 다른 재판부에 넘기라고 강요까지 했다”고 전했다. 이런 압력에도 불구하고 피고인 모두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판사에 대한 뒷조사가 이뤄졌다. 사용하던 차량의 번호판 봉인이 잘못됐다며 운전사가 경찰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고, 농협 조합장이던 친척은 난데없는 회계 감사를 받았다. 병원에 잠시 입원했던 부인의 진료비를 누가 내주지 않았는지도 뒤졌다고 한다. 중정이 안기부로 바뀐 뒤에도 압력은 계속됐다. “시위 학생을 풀어준 즉심 판결 다음날 저녁에 법원 당직실에서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안기부라면서 판사님 집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 가르켜주지 말라’고 했다. 다음날에는 내가 배석했던 부장판사가 ‘안기부에서 당신 전임지를 묻더라’고 말하더라.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안기부가 우리 집 전화번호나 내 전임지를 몰라 주변에 전화를 걸었겠냐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아, 지켜보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구나’라고 이해하게 됐다.” 1980년대 중반 수도권 지역에서 판사로 근무했던 ㅂ 변호사의 말이다. 1988년 통영지원에 근무했던 문흥수 변호사는 “당시 국가보안법 7조 5항(이적표현물 소지)에 대해 위헌심판을 제청한 일이 있는데 안기부 지역책임자가 직접 찾아와 ‘불쾌하다’는 뜻을 표했다”며 “이때의 좌절감과 분노가 사법부 개혁을 외치게 된 개인적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시위학생 풀어주자 “조심하라”우회압력
◇ 시국사범 양형 사전조정=1980년대 초반 대법원에 근무했던 고위관계자는 10여년전 <한겨레> 기자에게 충격적인 얘기를 털어놨다. 대법원장 비서실 고위관계자가 법무부, 안기부 관계자와 함께 상의해 전국 시국사범의 형량을 정하고, 대법원장의 결재를 받아 일선 법원장들에게 내려보냈다는 것이다. 당시 이런 발언을 한 인사(현재 변호사)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지만, 일선 판사들에게 ‘적정 형량’이 전달된 정황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983년 충청지역에서 시위를 준비하던 대학생들이 검거됐다. 정권비판 유인물 수백장이 증거로 제출됐다. 사건을 담당한 ㅊ판사(현재 변호사)는 “‘집시법 미수’도 아닌 ‘집시법 예비음모’쯤 되는 사건이었는데, 법원장이 양형을 같이 상의하자고 했다”며 “황당한 제안에 놀라 ‘어떻게 법원장이 법관의 양심과 법률에 의한 재판을 침해할 수 있냐’고 항의했다”고 말했다. ㅊ판사는 그 뒤 업무분장 때 민사 담당으로 바뀌었고, 이후 다른 법원으로 옮긴 뒤에도 형사 재판을 맡지 못했다. 그는 “5공 초기만 해도 법원장이나 수석부장이 형사사건의 양형을 상의하자고 제안하는 일은 꽤 있었다”며 “이를 거부하면 그 다음부터는 형사사건을 맡지 못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 중반 법원에서 근무한 ㅂ판사(현재 변호사)도 “시국사건을 맡으면 법원장이 수석부장을 통해 ‘그런 사건 정도면 얼마는 돼야지’라는 말을 전해오는 일이 흔했다”며 “다만 법원장 자신의 소신으로 그런 요구를 했는지, 법원 바깥의 주문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91년 재임용 탈락 ‘입맛대로’ 선별 의혹도
◇ 법관 재임용 관여 의혹=1991년 초 법관재임용에서 탈락한 30여명의 판사들이 법원을 떠났다. 평판이 좋지 않은 인사들을 내보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정권의 마음에 들지 않게 시국사건 판결을 내린 판사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재임용에서 탈락한 배태연 변호사는 “김용철 대법원장 취임 한두달 뒤부터 탈락자 통보 작업이 이뤄졌다”며 “법원 내부적으로 개별 판사들을 평가할 역량과 시간이 없었던만큼 판사들 판결 성향을 일일이 파악했던 안기부에서 (재임용) 작업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배 변호사는 1985년 춘천지법 근무 당시 반정부 서적 압수수색영장을 기각하고, 87년에도 가두시위 대학생들을 석방한 전력이 있었다. 93년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박우동(전 대법관) 변호사도 “팔이 안으로 굽는데, 그것(재임용 작업)을 어떻게 법원행정처에서 했겠느냐”면서 “법원행정처에서는 그런 것을 심사할 기구도, 자료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 전에도 없었으니만큼 (법원) 외부에서 했다는 추론은 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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