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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14 17:20 수정 : 2005.03.14 17:20

밝혀야할 국정원과거 <9> 조작간첩 논란

사진 안기부 프락치로 활동했다는 양심선언을 한 백흥용씨를 독일 베를린에서 만나고 돌아온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이덕우(왼쪽), 이기욱 변호사가 1994년 11월9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에서 “백씨가 김삼석, 김은주 남매간첩 사건에 관여했던 안기부원으로 지목한 사람”이라며 안기부 김아무개 과장(사진 오른쪽)과 직원 윤아무개씨의 사진을 공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독재정권의 정권안보를 위한 훌륭한 제물로써, 그리고 독재정권의 손발 노릇을 해온 안기부 요원들의 진급과 포상을 위한 재료로써 간첩은 계속 생산되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가 펴낸 <간첩조작은 이제 그만>이라는 자료집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런 ‘조작간첩’ 논란은 수사 과정에서의 불법구금, 고문 주장이 상당부분 사실로 확인되면서 개연성을 얻고 있다. 그러나 중정 고위 간부를 지낸 한 인사는 “법정에서 고문수사를 들먹이며 혐의를 부인하는 것은 간첩들의 정형화된 투쟁 방식”이라며 “간첩은 있어도 조작 간첩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매간첩 조작활동” 프락치 양심선언
물증 못찾자 “부쉈다”며 망치 증거로
재야인사 만나게 해 불고지죄 엮기도

◇ 프락치 동원 조작 의혹=1993년 9월 안기부는 반전평화운동연합 연구위원이던 김삼석(당시 28)씨와 동생 은주(당시 24·백화점 직원)씨가 일본에서 활동중인 북한 간첩에 포섭돼 공작금을 지원받아 간첩활동을 했다는 이른바 ‘남매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다음해 대법원은 오빠 김씨에게 징역 4년, 동생에게 징역 2년과 집행유예 3년을 확정했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 이틀 뒤인 1994년 11월5일 독일 베를린의 한 호텔에서 백흥용(당시 29·일명 배인오)씨가 “2년 동안 안기부 프락치로 활동하면서 남매 간첩단 사건 조작을 도왔다”는 양심선언을 했다. 안기부 직원들의 협박과 회유에 못이겨 암호명 ‘진달래’로 프락치 활동을 했으며, 1992년부터 김씨 남매에게 접근해 친분을 쌓고 일본 조총련계 사업가 등에게 북한 영화나 책자를 요구한 뒤 남매에게 대신 받아달라고 하는 수법으로 그들을 북과 연계시켰다는 것이다.

95년 1월 권영해 안기부장은 국회정보위에서 백씨가 안기부의 공작원이며, 백씨가 독일로 출국할 때 여권을 만들어 주는 등 편의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김씨 남매에 대해서는 “경중의 차이는 있으나 간첩인 것은 확실하다”고 답변했다.

백씨의 기자회견 직후 성명을 통해 “김씨 남매 조작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사건 관계자부터 안기부장까지 관련자를 모두 파면·해임, 형사처벌하라”고 요구했던 고영구 당시 민변 회장이 현재 원장으로 있는 국정원 소속 과거사위가 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낼 지 여부도 관심사다.

◇ 온 가족을 간첩으로=1981년 7월 발표된 ‘진도 가족 간첩단 사건’은 공소사실 일부가 사실과 다른 점이 밝혀지는 등 ‘조작’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전남 진도에서 농협 직원으로 근무하던 박동운(당시 36)씨는 ‘월북한 아버지 박영준을 만나 두 차례 북한에 다녀오고, 가족을 포섭해 간첩 행위를 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박씨의 어머니와 동생, 숙부도 실형을 선고받아 함께 복역했다.

안기부는 박씨가 저지른 간첩행위 가운데 하나로 ‘농협의 인사기록카드, 대차대조표 및 손익계산서를 사무실에 있던 전자복사기로 복사해 남파 간첩에게 건넸다’는 것을 들었는데, 시점이 1979년으로 돼 있다. 그러나 간첩죄로 17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뒤 박씨가 진도농협에 있는 기록을 통해 확인한 결과, 진도농협에 전자복사기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84년으로 확인됐다. 1984년에 박씨는 간첩죄로 광주교도소에 수감중이었다.

안기부는 또 박씨의 간첩행위 물증으로 망치를 제출했다. 박씨가 간첩행위 증거물을 숨겨둔 장소를 끝까지 대지 못하자, “무전기와 난수표를 망치로 부셔버렸다”고 진술한 것으로 꾸며 증거물로 ‘망치’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박씨는 “북한에 다녀왔다는 71년 10월3일에는 대구에서 추석을 쇠러 고향 진도로 왔으며, 이 사실을 귀향길에 동행했던 친구와 고향 사람들이 증명해줄 수 있었지만 검찰 조사나 재판 과정에서 아귀가 맞지 않는 안기부 조사 결과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6·25 때 행방불명된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는데 안기부에 끌려가자마자 각본대로 진술하기를 강요받았으며, “숙부가 한번 만났으니 아들인 너는 아버지를 두차례 만나서 북에 갔다왔다는 게 자연스럽다”며 고문으로 진술을 쥐어짜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지검에서 이 사건을 담당했던 안강민 변호사는 전화통화에서 “안기부 사건을 송치받아서 기록을 검토했는데 (박씨의) 어머니가 (안기부에서 진술한 내용을) 순순히 시인해서 조작이라는 느낌은 못받았다”고 말했다.

1982년 9월에는 대남공작부서인 북한 노동당 연락부 부부장 송창섭(당시 62)씨에게 포섭돼 25년 동안 간첩 활동을 한 ‘송씨일가 간첩단 사건’이 발표됐다. 당시 이 사건은 중정에서 안기부로 이름이 바뀐 뒤 최대의 실적으로 평가받았으나 대법원에서 한때 무죄 취지의 판결이 나오는 등 80년대 대표적인 조작간첩 사건으로 거론되고 있다.

안기부는 검거된 29명 가운데 송씨의 딸과 아들, 처남 등 12명을 간첩 혐의로 구속했다. 이들에게는 1심에서 사형과 무기징역 등 중형이 선고됐으나 2심에서 징역 25년~징역 4년6월 등 형량이 크게 깎였다. 이후 83년 8월 대법원(이일규 대법원 판사)에서 무죄 취지의 환송판결을 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결국 이 사건은 유무죄를 둘러싸고 2년여에 걸쳐 두차례나 대법원과 고등법원을 오르내리다 1984년 8월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그러나 간첩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7명에게 징역 7년6월~6월의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량이 선고됐다.

◇ ‘부여간첩’김동식 프락치 공작 의혹=1995년 10월 충남 부여에서 무장간첩 김동식이 경찰에 체포된 뒤 김동식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돼 이인영, 우상호, 함운경, 허인회, 박충렬, 김태년씨 등 재야 인사들이 잇따라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안기부 조사를 거쳐 ‘간첩 김동식을 만나고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혐의(불고지) 등으로 기소됐다. 박씨와 김씨에게는 90년부터 남파간첩에 포섭돼 간첩활동을 해 온 혐의도 더해졌다.

당시 사건 관련자들은 “‘김동식이 간첩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며 간첩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일관되게 부인했으나 안기부는 김동식의 진술을 그대로 혐의 사실로 인정했다”며 “간첩인 줄도 모르고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구속돼 곤욕을 치렀는데 체포 당시 총격전을 벌이다 경찰관을 숨지게 한 무장간첩을 기소조차 하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김동식과 안기부 사이에 커넥션 의혹을 제기했었다. 안기부가 1995년 12월8일 사건을 발표하기 이전에 재야단체 관계자들을 지목해 김동식에게 차례로 접촉하도록 한 뒤 그들에게 불고지죄 혹은 간첩 혐의를 씌워 잡아들인 의혹이 짙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당시 재야단체들은 “안기부가 5·18 민주화운동특별법 제정으로 민주개혁으로 가는 바람을 잠재우고 공안정국으로 몰아가려고 간첩 사건을 조작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실제 관련자 가운데 불고지죄로 기소된 함운경씨는 1998년 6월12일 서울지법에서 김씨가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공소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에 따라 무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김동식의 사법처리와 관련해 국정원은 “김동식은 안기부에서 기소유예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고, 98년 12월30일 서울지검 공안1부에서 공소보류 처분을 받아 사법처리가 끝났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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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남산 끌려가 불법구금
자백강요 고문끝 눈뜨니 ‘간첩’

이른바 ‘조작간첩’ 의혹을 받아온 사건에는 몇 가지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 간첩으로 발표된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이나 유럽에서 유학을 했던 사람 △북한에 가족이 있는 사람 △납북어부 △조총련계 가족이 있는 사람이거나 이런 사람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다.

간첩 사건에 연루됐던 이들의 주장을 모아보면, 이들이 중정이나 안기부에 끌려간 뒤 간첩이 되는 과정도 비슷하다. 어느날 영장없이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 불법구금을 당한 채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자백을 강요받는다. 이때 변호사의 도움은 받을 수 없고 가족 면회도 허용되지 않는다. 검찰 조사와 재판 때 불법감금과 고문 사실을 폭로하고 혐의를 부인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평양모습 말하라 고문하며 사진 보여줘 어느새 정말 다녀온 것처럼 줄줄 얘기”

간첩죄로 18년 동안 옥살이를 한 석달윤(71)씨는 1980년 8월21일 중정 남산분실로 끌려갔다. 지하실에 들어서자마자 군복으로 갈아입혀진 뒤 갖가지 고문이 시작됐다. 6·25 때 월북한 7촌 고모의 아들을 만나 간첩행위를 한 것을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송곳으로 하반신을 계속 찔러대면 검붉은 피가 온 몸을 적시고 피멍이 들었는데 그때마다 쇠고기를 얇게 썰어 온 몸에 붙여 피멍을 빨아들이게 했다. 쇠고기가 몸에 달라붙어 썩는 냄새는 또다른 고문이었다.” 석씨는 같은해 10월6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기까지 47일 동안 불법구금 상태에서 잠 안재우기, 성기에 볼펜심 쑤셔넣기 등 갖가지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간첩 사건에 연루된 이들은 길게는 100일 넘는 기간 동안 밀폐된 공간에 갇힌 채 고문을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해 안기부가 구속 수사할 수 있는 기간이 최장 20일인 만큼 이를 넘어서는 기간만큼은 불법구금인 셈이다.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 때 송씨의 큰 딸은 안기부에서 116일 동안이나 조사를 받았다. 또 “안기부 수사는 간첩이 될 대상을 찾은 뒤 사건 구성까지 끝낸 상태에서 고문을 통해 진술만 받아낸다”는 게 ‘간첩으로 만들어졌다는 이들’의 주장이다.

진도간첩단 사건으로 62일 동안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은 박동운씨는 “수사관들이 김일성 동상이나 평양시내 모습을 말해보라고 윽박지르면서 북한 사진을 슬쩍슬쩍 보여준다. 계속 고문을 당하면서 추궁을 받다보니 어느 순간 내가 마치 정말 북한에 다녀온 것처럼 사진 속 풍경을 줄줄 얘기하게 됐다”며 “준비된 진술서에 도장을 찍으면 입북 사실을 자백한 게 됐다”고 말했다. <끝>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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