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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연구에 나침반 되신 분 |
통일운동가 김남식 선생님 영전에
선생님, 그렇게 홀연히 가버리시면 저희는 어떡합니까? 이제 자료 읽다가 모르는 게 나오면 어디다 여쭤봅니까? “아, 그건 말이야” 하면서 어떤 문제든 거침없는 설명을 들을 수 있던 기회는 이제 영영 다시 오지 않는 겁니까?
지금 대학에서 현대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공부를 시작하던 1980년대에는 어디서도 현대사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1880년대 개화파 청년들이 백의정승 유대치의 약방을 드나들며 가르침을 받았듯이, 1980년대의 현대사연구와 북한바로알기에 나선 젊은 연구자, 활동가들은 선생님의 남가좌동 서재에서 새롭게 눈을 떠갔습니다. 어느 대학의 강단에도 서실 수 없었지만, 선생님은 분단된 이 땅에 현대사연구와 북한연구의 새 길을 연 우리의 스승이셨습니다.
선생님의 〈남로당연구〉가 없었던들 해방 직후의 현대사 연구는 어디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저희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해방일보〉며 〈노력인민〉과 같은 소중한 1차 자료들이 선생님이 아니었던들 어떻게 그 험한 시기에 살아남아 후학들에게 전해질 수 있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앞장서시고 저도 조금 거들며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한국현대사자료총서〉의 발간은 현대사 연구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1987년 이후 통일운동과 북한바로알기 운동의 열기 속에서 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 가르침은 왜곡과 자료부족으로 막막해 하던 저희에게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격동의 현대사에 온 몸을 내던졌다가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으로서, 선생님께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채 살아남은 자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옛 벗들의 사랑과 열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셨습니다. 남쪽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1960년대 중반부터 선생님께서는 처음에는 노예의 언어로나마 자료를 남기고 기록을 해 두셨고, 노년에는 주인의 언어로 젊은 날의 꿈을 새로운 현실 속에 이어가셨습니다.
한국사의 격변이 얼마나 많은 젊은 청춘들의 삶에 주름을 지어놓았습니까? 이른바 원로라는 이름 하에 노추를 부리는 자들로 가득 찬 이 시대에, 선생님처럼 젊은 날 역사가 구겨버린 개인의 삶에 잡힌 주름을 나이 들수록 오히려 곱게 펴놓고 가신 분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통일의 꿈길에서 앞서가신 벗들과 반갑게 만나 못다한 〈우리 민족 이야기〉 나누고 계십시오. 통일의 소식, 저희들이 올리겠습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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