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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06 20:39 수정 : 2007.05.07 09:47

배씨 집안 삼동서인 박희순·황춘례·김영희씨와 이웃사촌 사이인 김진희·이을용(왼쪽부터)씨가 천안역에서 서울행 전철을 기다리고 있다.

[르포] ‘실버투어’로 자리잡은 서울-천안 국철 동승기

‘덜컹’ 열차가 출발했다.

“어디 가긴? 독립기념관 가지. 공짜로 바람 쐴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

지난 2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종로3가 지하철역. “어디 가시느냐”고 묻자, ‘초등학교 동창으로 한동네에서 살고 있다’는 고규복(71·경기 일산), 정순익, 조덕희씨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고씨는 “건강이 최고야, 집사람은 멀미가 심해 같이 못 다녀”라며 아쉬운 표정이다.

그는 “동네 노인복지관에서 컴퓨터를 배우는데 자꾸 잊어버려. 손주들하고 이메일을 하고 싶어 또 수강 신청했어. 사람이 너무 많아 몇 달 기다려야 차례가 온대.” 옆자리에 앉아있던 이아무개(76·서울 광진구)씨가 “복지관에서 컴퓨터도 하고 세상 정말 좋아졌지”라며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서울~천안 전철 노선이 ‘실버투어’로 자리잡았다. 병천순대(4천원)를 먹고 천안역~독립기념관 가는 버스비(왕복 2200원)를 내도 1만원이면 된다. 이 노선은 특히 여름과 겨울, 주말·휴일에 노인이 많이 탄다. 여름엔 차안이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고, 주말·휴일에는 통학하는 학생들도 없어 한가하기 때문이다. 철도공사 쪽은 하루 2천~3천명이 이용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서울을 빠져나가면서 전철 안은 서로 수인사하기 바쁘다. 세상사는 이야기도 넘쳐난다. 요즘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단골 손님이다.

“김 회장 참 몹쓸 사람이야. 지 자식 귀한건 알아도 남 자식 귀한건 모르잖아?” 여기저기서 “맞다!”고 맞장구를 친다. “쯧쯧” 혀를 차는 소리도 들린다.

약장수도 잇따라 나타났다. “신발에 깔면 다리 아픈 게 없어집니다”라는 밑창장수에 이어, “약국에서 파는 것보다 10배나 효험이 있는 파스 사세요”를 외친다. 밑창과 파스 값은 모두 3천원이다. 회사가 어려움에 처해 특별 봉사기간 동안 싸게 판다는 내용은 세월이 흘러도 똑 같다.

열차가 수원역에 이르자, 이웃에서 30여년 “언니, 동생”하며 살았다는 조아무개(76·여·의정부)씨와 임아무개(72·여·수원)씨가 탔다. 자리에 앉자마자 쑥덕과 두유를 꺼내는 모습이 소풍가는 여학생 같다.

“신발 벗고 있으면 어떻게 해? 예의를 지켜야지.” 갑자기 건너편 경로석에서 호통이 터져나왔다. 빨간 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앞에 앉은 할머니를 혼낸다. 할머니들이 한마디씩 했다. “군기반장이 타셨구만.”

전철은 오산을 지나면서 드문드문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언뜻 스쳐가는 창밖은 더 푸르러졌다. 옆 칸으로 옮겨보니, 김영희(72·능곡), 황춘례(70·일산), 박희순(68)씨의 대화가 도란도란 들린다. 이들은 배씨 집안 삼동서란다. “조카사위가 기러기 아빤데 딱해. 같이 살아야 가족이지.”

전철이 천안역에 도착하자 이들은 일행끼리 나뉘어 병천순대집, 독립기념관, 시장안 분식집 등으로 흩어졌다. 붉은 영산홍이 활짝 핀 독립기념관 안의 벤치 그늘에는 다리를 두드리며 쉬는 노인들이 많았다. 수학 여행온 경남 양산 백동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매점에서 할머니 드린다며 효자손을 사자 지켜보던 할머니들이 “그놈들 효자네”하며 이구동성으로 칭찬한다.

그때 김진희(72·여)씨가 허겁지겁 안내소로 들어섰다. 같이 온 동네 언니가 힘들어 해 쉬라고 했는데 그게 어딘지 모르겠단다. 방송이 나갔다. “수유리에서 오신 여든두살 이을용씨는 겨레의 집 앞으로 와 주세요.”

해그림자가 길어진 오후 늦게 고규복씨 일행은 서울행 전철을 탔다. “평생지기들하고 같이 다니면 얼마나 좋은지 알아? 지난주엔 현충사 갔었어!”

글·사진/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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