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후 상황은 진정되었다. 세 번째 임무가 하달되었다. 헬기를 타고 광주를 지나 지원동에 주둔하고 있는 공수부대와 임무 교대하란 명령이었다. 우리는 헬기를 타고 지원동을 향했다. 총격 발생 후 광주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환한 대낮인데도 행인의 발자취를 찾기 어려웠다. 항공기는 광주시내에 전단을 뿌려대며 “폭도들은 무기를 버리고 자수하라.”며 외쳐대고 있었다. 헬기가 지원동에 착륙했다. 공수부대원들이 헬기에서 내린 우리를 보고 “X만한 새끼들..”이라며 조롱하였지만 우리는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상대는 공수인데다 우리보다 계급도 높았다. 참호를 파고 매복에 들어갔다. 수칙은 간단하다. 낮에는 검문하고 밤에 이동하는 차량에는 집중사격을 하란 명령이었다. 밤이 되었다. 그리고 비가 내렸다. 매복 중 어디선가 총성이 들린다. 간헐적 총격이 아니라 격렬한 전투였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소대에 방탄조끼가 지급되었다. 대원들의 볼멘소리가 이어졌다. “제기랄 총 맞을 일 생겼나보다...” 지원동에서 시내쪽으로 수색을 하다 보니 소복을 입은 사람들이 광주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급히 챙긴 살림살이를 등에 매거나 머리에 인 그 모습은 영락없는 전쟁의 피난민이었다. 그리고 얼마후.. 나는 거기서 ‘전두환’이란 이름을 처음 보았다. 부대원 중 누구도 그 이름 석자가 그 후 28년간 사람들에게 끝없이 회자될 살인독재자인지 알지 못했다. “전두환이 누구냐?” 누군가 물었다. “광주고속 사장인가봐요.” 길가에 처박힌 광주고속버스에 “살인마 전두환”이란 글귀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대장은 우리 분대에 버스를 수색할 것을 명령했다. 지난밤의 총격은 바로 이 버스를 향한 사격이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버스의 운전석은 집중사격을 당해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고, 버스의 측면 철판도 벌집처럼 구멍이 나 있었다. 버스는 최소한 수 백발 이상의 총격을 받은 것이다. 버스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역한 피비린내가 났다. 차량 내벽에는 튀어 붙은 피와 살이 덩어리가 되어 젤처럼 굳어가고 있었고, 버스 안에는 수백발의 M -16 탄피들이 피 덩어리와 뒤엉켜 널 부러져 있었다. 그 차량에 사격을 가한 병력이 차 안까지 들어가 확인사살을 했다는 증거였다. “이것은 분명 학살이고 살인이다.” 목 밑으로 구역질이 치받쳐 올라왔다. 도망치듯 버스에서 내려오니 부대원들이 푸르게 자란 보리밭을 수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리가 쓰러진 곳 마다 처참하게 살해된 주검들이 숨겨져 있었다. 내 기억으로 무려 11구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그중 여자가 세 명 이었다. 얼마 후 염사가 왔고 시신은 누군가에 인계되었고 우리는 주둔지로 철수하였다. 당시의 나는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나라와 국민의 안위를 책임지는 군인이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현장을 목격하면서 그런 긍지는 사라져버렸다. “야간에 이동하는 차량에 발포하는 것은 명령 때문이었다고 치자. 도대체 왜 죽은 사람에게 까지 총을 쏘았어야 했는가?”나는 아직도 그들에게 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내가 80년 5월에 군인의 신분으로 광주에 있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내 눈으로 확인되지 않은 어떤 소문도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광주민주화운동’ 혹은 ‘광주항쟁’ 한때는 ‘광주사태’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했던 광주의 비극은 그해 5월 뜨거운 아스팔트에 섰던 모든 살아남은 사람이 죄인인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그 많은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원흉과 주구들은 여전히 뻔뻔하고 파렴치하며, ‘명령 이상의 학살을 자행한 미치광이 군인들의 만행’에 대한 실체는 여전히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해마다 5월이 오면 ‘광주정신의 계승’을 외치며 광주를 찾는 정치인들의 무리이동을 보며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광주를 알아?” “정말 광주 정신이 뭔 줄 알기나해?”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기사공유하기